[294번째책] 똑바로살아라 신정일

똑바로살아라-신정일

책속의 한구절

—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모든 문제를 백성의 입장에서 풀어 가야 하고, 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존중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기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본사상은 그의 개혁 사상의 기저이자 출발점을 이루는 것으로서 민본 정신의 정치적 구현이 그의 정치사상으로 전개된다.

  • 관습적인 신분의 차별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도전이라는 사람은 대단하다.

  • 2019년의 한국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여전히 유행처럼 널리퍼져있다. 사람을 능률이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존재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자신이 잘보여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 딱 봐도 경제적으로 힘들어보이고 약해보이는 사람을 진정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나야말로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지위로 경중을 따진적이 많았지 않았나 반성한다.


정도전은 지방 수령으로 있을 적부터 이러한 폐단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힘겨운 유배 생활을 통해 백성의 고통에 더욱 공감하게 됐다. 정도전은 사전에서 나오는 곡식들을 일정량만 제외하고는 모두 관가로 돌리게 했다. 이러한 개혁은 이성계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정치하는 사람들은 공감을 먼저 할줄 알아야 한다. 소위 힘있는 정치인들은 공감에 필요를 못느끼고, 대중들에게 진정 필요한 정치인들은 언론과 대중에게서 인기가 없거나, 공격을 당하곤 한다.

  • 솔선수범. 대한민국 정치인들에게는 이것보다 더 이상 더 이하도 필요치 않다. 그정도만 하면된다. 노블리스오블리제. 그거면 된다. 다른건 바라지도 않는다.

  • 정도전은 솔선수범에 앞서 자기 삶으로 민중의 고통을 피부로 느끼며 먼저 공감했다. 고통의 순간이 있었기에 자신의 지위에 현혹되지 않고 솔선수범을 보일 수 있었다.


정도전은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토지 분배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인구수에 따른 토지 재분배와 공전제 및 10분의 1세의 확립을 실현하려 했다.

  • 계획과 실현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하지만 그 종이 한장의 간격에 보이지 않는 노력의 크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다.

  • 고통을 통감한 사람들은 보통 분노를 느끼고, 그 분노를 원동력 삼아 일을 추진해나간다. 하지만 분노를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면 이성적 판단을 해내지 못할 때도 있다. 공감하되 분노를 다스리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범인의 처세일 것이다.


조광조의 왕도 정치가 실패한 원인은 너무 진보적인 정치 이념과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돼 왔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 정치를 뒷받침해 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 혁신에 앞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의 정신적, 제도적 성숙도가 성공을 좌우한다. 급진적인 개혁은 항상 부작용을 낳곤했다. 하지만, 급진적으로 개혁을 진행하지 않으면, 탁상공론으로 흐지부지 되어 버리고 만다. 준비하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변화를 일으키기에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 급하게 먹는 밥은 반드시 체하는 법이다.

왕도 정치를 주장했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실패했던 이유는 첫 번째 급격한 혁신 정치로 훈구파들의 분노를 산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도학 정치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조광조가 무고한 줄 알면서도 훈구파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고, 세 번째 이유는 소격서 폐지로 후궁들의 미움을 산 것이었다. 조광조가 온 나라의 인심을 한 몸에 모은 것 또한 그를 곤궁에 빠뜨리게 한 원인이 됐다. 이는 조광조가 귀양길에 오를 때 “거리를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옷깃을 모으고 절을 했다. 이렇게 인심을 얻은 것이 죄가 된 것이다” 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예전부터 조정에서 전라도 인물을 기피하여 전라도 출신들이 고위직에 참여한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이로 인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전라도로 모여들어 이곳이 정치 혼란의 근원지가 됐다.

  • 조선시대부터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전라도가 되었다니.. 이런…

조선 전기에는 호남 출신의 문과 급제자 260명 중 2명을 제외한 사람들이 관직에 나아갔다. 하지만 후기로 넘어오면서 323명 중 28명이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 중 당상관에 오른 자의 비율도 35.7%에서 19.5%로 크게 줄었다.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으면서 학문적 분위기가 크게 위축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왕실을 원망하는 호남 사림들이 과거를 포기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원망하며 관직에 나서지 않는 적극적인 저항이, 과연 성숙한 모습일까. 성숙한 분노였다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을까? 전라도를 터전으로 살아온 어른들이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지혜로운 분노를 보였다면, 지금의 호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실로 안타깝고 아쉬운 면이다.

정여립은 암울했던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대동사상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렇다면 그가 꿈꿨던 대동 세상은 무엇인가? 대동에서의 동同은 한 장막 안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예기禮記》에 실린 설명은 이렇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불평등과 한은 존재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동은 반제 반봉건의 이상적 상태이자 한과 비애로부터의 자유였다. 하지만 대동사상은 인류 역사상 어떤 이념에도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위험한 반체제 사상으로 남아 있었다. 정여립의 선구적인 대동사상과 천하공물론 역시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후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으로 계승됐고 다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 으로 이어졌다.

  • 제아무리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더라도 그 뒤에서는 평등한 세상에서 자기배를 불리는 하이에나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역사를 돌이켜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했던 국가들을 되돌아 본다면 인간의 욕심은 뻔한 결론에 이르곤 한다.

  • 말로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인간치고 사기꾼 아닌 사람을 못봤다. 보이기 위한 행동과 말로 치장하는 인간들을 주의하자.


사람이 살 만한 곳을 고를 때는 첫째 지리가 좋아야 하고, 다음은 그곳에서 얻을 경제적 이익, 즉 생리生利가 있어야 하며, 다음은 그 고장의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가 좋아야 한다.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 지리, 경제적이익, 인심, 산수, 광주는 산수 하나 빼고는 그다지 좋은점이 없는 곳인듯 하다.

  • 사람들이 몰리지 않은 지역에 오히려 기회가 많다. 말그대로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위기를 한탄할 시간에 위기 속에 감춰진 기회들을 꾸준히 관찰하는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