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번째책] 손석희가말하는법 부경복

손석희가말하는법-부경복

책속의 한구절

생각 전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CPU 성능이 좋은 사람이다. 남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과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정작 기업이나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인재는 이렇듯 자신의 CPU 성능을 높여갈 줄 아는 사람이다.

남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빠르게 이해하고 찾아내는 능력은 경험을 통한 체득이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말그대로 Compile 단계가 아닌 Runtime 에서 발생하는 상황들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본 사람이 위기상황에 빛을 발한다.

10년간 나라 안팍으로 의견 대립이 가장 심각했던 사안 중에 그가 다루지 않은 사안을 찾아보기 힘들다. 손석희는 그런 사안을 두고 가장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과 논쟁을 벌이지만 언제나 차분하다. 이로 인해 그의 말은 더욱 논리정연하게 들리고, 듣는 사람들을 지적으로 성숙하게 만든다. 결국 상대방은 그의 말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상대방과 논쟁을 하면서도 상대방과 맞서지 않는다. 설득력이 없고 불쾌하다고 느끼는 다른 사람들을 내세운다. 이제 상대방은 손석희에게 덤벼들 수가 없다. 대신 손석희가 내세운 제3의 적과 싸워야 한다. 손석희는 상대방이 제3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자신의 칼을 휘둘러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과정에서 약점을 보일 때 상대방의 옆구리를 예리하게 벤다.

상대방을 반드시 설득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상대방과 의견대립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손석희 같은 경우 진행자의 위치이기 때문에 한수 접어 둘 수도 있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손석희 같이 논리적인 주장과 대응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손석희가 말하는 법 역시 이러한 논리 전개 기술과 무관하지 않다. 손석희는 상대방과 논쟁을 하면서도 ‘자신이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제3의 적과’ 싸우게 한다. 이를 통해 자신과 상대방의 감정적인 공격을 논쟁에서 배제한다. 상대방은 제3의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종종 흥분하지만, 손석희는 감정의 폭발을 철저히 억제하며 이성 뇌의 활동을 극대화한다. 언제나 흥분하는 쪽은 상대방이고, 손석희는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하며 흥분한 상대방이 드러내는 약점들을 빠짐없이 지적해낸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제3의 적과 싸우게 하는것. 말은 쉽지만 제 3의 대상이 없거나, 상대가 이를 간파하고 피해간다면? 정치인들같이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통할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 손발로 뛰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화가 과연 먹힐까? 현장의 언어는 분명히 토론 테이블 상의 언어와 다르다.

손석희가 말하는 법 특유의 ‘차분함’은 이렇게 완성된다.

손석희가 내세우는 제3의 상대방을 좀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 생각 또는 관점이다. 다시 한 번 손석희가 말하는 법을 들여다보자. 손석희는 왜 상대방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과 다른 ‘생각’을 내세워서 이에 대한 반론을 끌어낼까? 손석희는 왜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이것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화법은 상대방이 ‘인신공격의 오류’를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인신공격의 오류는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논리가 아니라 그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공격해 그 논리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나도 흔히 저지르는 실수 이다. 대립되는 주장을 단순히 주장 자체를 검증하기보다 주장을 내세운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을 공격해야 그 사람이 주장하는 논리 또한 약해진다고 생각해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것은 상대를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시키고 생각을 바꾸도록 유도하는 것이 논쟁에서의 진짜 성공?이 아닐까.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1법칙 스스로 상대방과 싸우지 마라. 상대방이 반대의 생각과 싸우게 하라.

손석희의 말이 언제나 차분하게 상대방의 오류를 찾아내는 이유는, 상대방을 반대 생각과 싸우게 함으로써 자신과 상대방의 감정 개입을 철저히 통제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힘 있는 다수의 생각이 힘 없는 소수의 생각을 제압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힘 있는 다수가 언제나 이기는 사회, 바로 미개사회의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지적 미개사회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문명사회와 지적인 원시 미개사회가 공존하면서 부조화를 빚어내는 것이다

논쟁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내세우고 싶은 것은 상대방의 주장과 대립되는 자신의 주장이다. 흔히 이런 욕심이 앞서기 때문에 첫째, 주장을 주장 그대로 말하고, 둘째, 주장을 먼저 내세운다.

손석희는 다르다. 손석희는 주장을 사실로 바꾸어 말하고, 이러한 사실을 먼저 말한다.

손석희의 말이 명쾌하게 들리는 이유는 첫째, 그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사실로 바꾸어’ 말하기 때문이다.

바르도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손석희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랐을까? 손석희의 머릿속에도 분명 상대방의 주장이 문화상대주의에 반하는 잘못된 주장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손석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지 않는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반대 주장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사실에 관한 이야기나 질문으로 풀어서 말한다.

손석희의 말이 명쾌하게 들리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사실에 관한 이야기를 주장보다 먼저 말하기 때문이다.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2법칙 주장부터 늘어놓지 마라.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먼저 말하라.

손석희는 이러한 논리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기 전에 상대방에게 사실을 묻고 자기 생각을 사실로 풀어 말한다.

손석희가 말하는 법의 또 하나의 특징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당대의 언변 있다는 인물들이 토론과 인터뷰의 상대방으로 나오는데, 손석희는 그들을 냉철하게 휘어잡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과 상대방, 청취자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방식의 힘이 크다.

역사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적은 개혁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수구 세력이 아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위로 세력이다. 킹은 이 연설에서 흑인의 지위에 대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목소리에 맞서 왜 투쟁을 멈출 수 없는지를 말한다.

다수는 자신들의 차이는 다양성의 상징이라고 말하고, 소수자들의 차이는 일탈이라고 말한다. 다수의 이익은 국익이라고 말하고, 소수의 이익을 위한 노력은 계층 갈등이라고 말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한 일은 투자라고 말하고, 소수의 이익을 위한 일은 비용 지불이라고 말한다.

그는 다수를 다수라고 인정하고, 그들의 생각이 합리적인지를 따져 묻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가 무작정 소수의 편에 서서 말했다면 사람들은 고마웠을지언정 통쾌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주도하는 현실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대신 합리성이라는 사회적 의무를 요구한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통쾌함을 느낀다. 손석희가 말하는 법의 통쾌함은 이렇게 완성된다.

언제나 다수의 뜻대로 움직일지라도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려면 합리적이어야 하고, 소수의 의견도 동등한 권리가 있기에 평등하게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어긴다면 그것이 곧 탄압입니다

다수의 생각이 합리적인지 묻는 소수의 입을 틀어막는 것을 인류는 탄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 이성의 힘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히틀러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정권을 장악했고, 미국 의회는 베트남 참전을 88 대 2의 다수결로 승인했다.

소수의 의견과 입장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소수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는 고인물이 되어 썩을 수밖에 없다.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4법칙 다수를 인정해주라. 그들에게 합리성을 물어라.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손석희와 대화하는 이들 중 누구 하나 “손석희 씨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이런 점에서 참 잘못했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권력층일수록, 낯 뜨거운 뻔뻔스러움으로 무장하고 말을 돌리고 논점을 회피하는 데 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취자들은 대화가 끝나는 순간, 누가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고수는 마지막 순간에 칼을 거둠으로써 승리를 완성하고, 거두어들인 칼날은 휘두르는 칼날보다 더 극명하게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드러낸다.

손석희의 화법은 다르다. 논리적으로 상대방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상대방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는 다시 논리의 한 발을 내딛는다. 상대방은 한 발 더 뒤로 물러난다. 상대방이 벼랑 끝에 섰을 때, 그는 논리의 칼을 거두고 물러선다. 상대방은 그제야 자신이 선 자리를 돌아보고 이미 자신이 벼랑 끝까지 밀렸음을 깨닫게 된다. 보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논쟁에서 신경질은 흥분이나 분노와 같이 패자가 보이는 전형적인 특성이다. 논리싸움에서 마지막까지 밀린 것이다. 그러나 손석희는 여기서 박근혜를 벼랑 밑으로 밀지 않는다. “지금 아무런 논거도 없이 막연히 한나라당은 앞으로 잘할 수 있다는 말만 하고 계시잖아요!” 하고 추궁하지 않는다. 손석희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진 않습니다.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대화 중에 자기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은 손석희가 가진 큰 무기이다. 나도 이 무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대화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제어하며 보다 철저하게 상대를 파악하고 분석해내기 위함이다. 손석희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우리는 논쟁에서 상대방을 벼랑으로 밀어가고, 벼랑 끝이 보이면 벼랑 밑으로 떨어트리려 덤빈다. 상대방은 자신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서 말바꾸기든, 인신공격이든, 감정적 공격이든, 가리지 않고 맞받아치고 덤벼든다. 논쟁은 감정싸움으로 흐르고, 논점은 흐려지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판단력은 흐트러지고, 보일 듯했던 진실은 다시 가려진다.

손석희는 상대방과 감정싸움을 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반복하는 상대방에게 적대감이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적대감이 오히려 진실을 가리기 때문에 통제하는 것이다. 싸움의 종료 직전까지 애써 진실을 가리고 있는 상대의 커튼을 논리의 칼날로 걷어낸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사실의 반대편에 놓인 사실들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상대방이 싸우려고 덤벼들 때, 칼을 거둔다.

손석희가 말하는 법의 ‘예리함’은 이렇게 완성된다.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5법칙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라.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항복을 요구하지 말고 돌아서라.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어가는 상대방의 발을 링 위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방 자신이 내뱉은 말이다. 우리는 신문에서 과거의 발언에 발목이 잡혀 공직의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인사들을 자주 보게 된다. 자신이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말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저항하는 상대방의 힘도 커진다. 내 말의 절대적인 힘이 커질지는 몰라도 그에 비례해 상대방의 저항하는 힘 역시 커진다. 그러므로 내 힘과 상대방의 힘의 차이는 여전히 변함 없거나 오히려 줄어든다.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공격적으로 나가지만 상대방을 압도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법은 이런 식이다. 나와 상대의 강한 힘이 맞부딪혀 불꽃이 튀다가 어느 순간 뚝하고 부러져버린다. 결론은 나지 않고 싸움만 나는 것이다.

손석희는 상대방이 쏟아내는 강한 말의 힘을 이용해 그를 제압한다.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받아 다른 상황에서 다시 상대방에게 들려준다. 상대방이 강하게 말을 쏟아 낼수록, 그 말들은 상대방 자신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는 강한 힘으로 반작용한다.

손석희의 부드러움은 나약함이 아니다. 손석희의 부드러움은 상대방이 강하게 던지는 말을 절묘하게 받아내 다시 상대방에게 자기 검증의 단어로 던져준다.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6법칙 상대방의 강한 말을 귀 기울여 들어라. 그 말로 상대방을 스스로 검증하게 하라.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에게도 사실을 말하도록 한다. 관념적인 단어들을 적당히 늘어놓아 오류를 숨기고 주장만을 내세우는 상대방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도록 이끌어냄으로써 그들의 주장에 숨어 있는 오류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다.

손석희는 〈100분 토론〉에서 자신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자는 방송 토론의 제한된 시간 안에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말하는 사람이 내놓아야 할 것이 주장이 아니라 데이터, 즉 사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사실을 마음대로 늘어놓을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진술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주장을 공격하려 덤빈다.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면 할수록, 반대 주장을 강하게 내세워서 상대방의 주장을 이기려 든다. 상대방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역시 어떠한 사실을 확인해야 하고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애쓰지 않는다.

손석희가 상대방의 강력한 주장을 매번 무력하게 만드는 비법은 자신의 주장을 더 강하게 내세우는 대신 상대방의 주장을 받쳐주는 사실을 반대 사실로 검증하기 때문이다.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7법칙 주장하는 자에게 사실을 말하게 하라. 사실 검증의 장에서 싸우라.

손석희는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회의 건전한 토론 문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은 불신과 다름에 대한 관대함의 부족입니다.

나 또한 불신과 관대함의 부족으로 토론을 망친 적이 많다. 부하직원이나 논리적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주장을 이야기 하는 도중에 잘라내고 반박과 공격으로 토론이 아닌 일방적 인신 공격으로 몰아가곤 한다. 반성하고.. 습관을 고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의사소통의 부재입니다. 한 서클 안에서 끼리끼리 소통은 이뤄지지만 이 서클과 저 서클 간의 소통은 단절돼 있습니다. 이런 의사소통의 복원을 위해서는 서로 인정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신감의 부족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절된 소통. 50~60대 들은 단절된 소통의 선두주자들이다. 그 어느것도 나와 다르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눈에 흙이 들어온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런 중년들 때문에 나라가 이모양 이꼴이 나고 있는데도 정신을 못차린다. 나이를 먹되 깊은 내공으로 진정한 소통을 나눌 줄 아는 성숙한 중년이 되자.

기형적인 지적 능력의 소유자는 다음 같은 세 가지 상황에 처한다. 첫째,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둘째, 생각 전달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상대방이 내 생각을 이해하고 수긍하지 못한다. 셋째, 상대방이 내 생각의 오류를 지적하는 낯선 상황에 처하면 감정적인 적개심이 앞선다.

딱 내 모습이다. 나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고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고질병이 나아지려면, 내가 부족함을 깨닫도록 끊임 없이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깊이 공부한 사람들은 공부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고 하지 않는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말자. 그래야 조금이나마 겸손하게 살 것 같다.

결국 내 생각이 옳은데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흔히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입을 막으려 애쓴다. 그러나 손석희는 틀린 말을 옳은 말보다 더 귀담아 듣는다. 그리고 반론을 제시하고 대답을 끌어낸다. 어둠을 몰아내려고 쫓아다닌다고 어둠이 없어지진 않는다. 어둠은 빛을 비출 때 비로소 사라진다. 손석희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색깔들이 토론의 장에서 서로를 비추고 빛을 발하게 한다.

왜 우리 사회는 다른 생각에 관대하지 못할까? 왜 그들의 입을 막으려 애쓸까? 왜 다른 의견에 적개심부터 가질까? 이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른의견이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주장을 반박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오르고 대화로 이어진다.

▶ 손석희가 말하는 법 제9법칙 서로 다른 생각들을 관대하게 수용하라. 이성과 합리의 지렛대로 하나 됨의 힘을 얻어라.

오늘을 말하는 손석희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언론의 역할과 문제에 대해서도 냉철하고 현실적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언론이 처한 현실을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가 팽창하면 언론은 당연히 비대화된다. 그걸 권력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언론은 지금 watchdog(감시견)과 lapdog(애완견)을 넘어 guard dog(경비견) 역할을 한다. 경비견은 이미 자신이 기득권자가 되어 기존의 사회체제를 지키고 침입자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짖는다. 상대가 정부라 하더라도 자신의 기득권 체제에 침입한 것으로 간주하면 싸운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미 경비견이 된 언론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 하지 말고 법 규정과 시민사회에 맡겨야 한다.

손석희는 평생을 두고 추구하겠다고 다짐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방송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방송이란, 어느 사회에서도 강자가 있으면 약자가 있는데 약자들의 목소리를 소외되지 않고 균형 있게 다루어주는 것이다.

사람은 끝을 봐야 알 수 있다. 끝을 보기전에는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지금은 비록 손석희씨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마지막의 모습이 어떠한 가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퍼스트 레이디로 꼽히는 엘리너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