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번째책] 숨결이바람될때 폴 칼라니티

숨결이바람될때-폴칼라니티

책속의 한구절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다양한 강도의 등 경련을 경험했다. 그냥 무시할 수준의 통증에서부터 이를 갈며 말도 못할 정도의 통증, 바닥에 쓰러져 몸을 둥그렇게 말고 비명을 내지를 만큼 심한 통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번 통증은 가장 극심한 편에 속했다. 나는 대기실의 딱딱하고 긴 의자에 누워 허리 근육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이부프로펜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숨을 내쉬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경련이 일어나는 각 근육의 명칭을 속으로 불렀다. 척주세움근(erector spinae), 능형근(rhomboid), 활배근(latissimus), 이상근(piriformis)…….

의과 대학원 4학년이 되자 많은 동기들이 방사선과나 피부과 같은 덜 고된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어리둥절해서 다른 유명 의과 대학원의 경우는 어떤지 알아봤더니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근무 일정이 좀 더 여유롭고 연봉은 더 높고 스트레스는 덜한, ‘느긋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전공 분야로 눈을 돌렸다. 입학 논술에서 그들이 내세웠던 이상주의는 물러지거나 아예 사라졌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수술실에서의 시간이 재미있는 점은 정신없이 전속력으로 움직이든 차근차근 나아가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지루함이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수술은 그와 정반대이다. 고도로 집중하다 보니 시곗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간이 마치 일 분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바늘땀을 뜨고 상처를 치료하고 나면 갑자기 일상의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긴장감 높은 분야의 의사는 삶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삶이 굴절되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환자를 만나게 된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책 전체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 내 병은 삶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산산조각 내버렸다. 형형한 빛이 정말로 중요한 것을 비춰주는 에피퍼니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앞길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병을 앓으면서 겪게 되는 종잡을 수 없는 건 가치관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환자가 되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려고 계속 애를 쓰게 된다.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암은 무자비하게도 시간뿐만 아니라 기력까지 빼앗아버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크게 줄었다. 마치 경주하다가 지친 토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설사 기력이 있더라도 나는 거북이의 방식이 더 마음에 든다.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고 깊이 명상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그냥 어떻게든 버티는 날들도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팽창한다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시간은 수축될까? 분명 그렇다. 내가 보내는 하루는 엄청나게 짧아졌다.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폴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 신경외과의 최고참 레지던트였던 시절에는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내 옆에 누워 노트북을 조용히 두드리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중에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오후를 보냈다. 진료를 받으려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글을 썼고, 화학 요법을 받으며 약물이 혈관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오면 주저없이 받았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은색 노트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화학 요법 때문에 손가락 끝이 갈라져서 아플 때에도 솔기가 없고 가장자리가 은색으로 된 장갑을 끼고 노트북의 트랙패드와 키보드를 만졌다. 점점 악화되는 암으로 살인적인 피로를 느끼면서도 완화치료를 받는 동안 그가 제일 신경 썼던 건 집필에 필요한 정신력의 유지였다. 그는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폴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거의 매순간 그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우리가 여전히 함께 만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별은 부부애의 중단이 아니라, 신혼여행처럼 그 정상적인 과정 중 하나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결혼 생활을 잘 영위하여 이 과정도 충실하게 헤쳐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