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번째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고통은나눌수있는가-엄기호

책속의 한구절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고통을 고통으로 지속시켰다. 따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고통이 끝나는 것. 고통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고통에 대한 언어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 끝난다면 그 모든 걸 접을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고통이 그랬다. 사회적 관계로 인한 것이건 육체적 질병에 의한 것이건 사람들을 가장 공포스럽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통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힘든 상황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치정권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피해자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보면 끝을 알수 없는 고통속에서 인내하여 견뎌내는 모습이 생각을 스쳐 지나간다.

고통속에서 해결해나갈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때가 진짜 고통의 시작이다.


말로 세계를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응답이다. 모든 말은 응답이다. 누군가의 표정이나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말은 시작된다. 그렇게 말이 시작되면 들은 사람은 그 말에 응답한다. 모든 말은 응답을 기대하며 응답하기에 말이 된다. 고통을 겪으며 자기에게 함몰된 이가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응답으로서의 말이다. 응답을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딜레마다. 그래서 그 말이 파국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내뱉게 된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느껴지면 사람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선택을 한다.

내 주변에 고통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떤 역할을 해 줄 수 있을까. 그저 기다려주는 것이 답일까. 과연 비를 같이 맞아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맞을까?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이 이제 막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언어 없음’의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고통을 표출하지 못함으로써 무력감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분노, 불안, 걱정을 적절한 표현과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정신적인 문제에 봉착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자신이 표출하고자하는 감정을 솔직하게는 못하더라도 애둘러서라도 표현해야 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억울함’이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일이 닥쳤을 때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자기와 비슷한 처지이거나 자기보다 나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겪지 않는 것을 자기‘만’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억울함’이다.

큰 사고를 당하거나,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때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억울하게 느껴본적이 없다. 그저 살면서 겪어가는 좋은 경험이구나 생각하고 넘어가곤 했다.

내가 만약 하루아침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일만큼 위중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두렵고 당황스럽겠지만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온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행복했기에 생의 마지막을 기다려야한다면, 아끼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차분하게 준비해 나갈 것 같다.

나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했다. 이 고통을 통해 자기가 좀더 단단해진다든지, 이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더 나은 행복이 찾아온다든지, 누구나 이런 일을 겪으며 인생에 대해 알게 된다든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가치가 있다면 고통을 겪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고통일 뿐 그 안에서 어떤 가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살면서 겪었던 어려움속에서 나름은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안에서 가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힘들고 고달팠지만 의미를 찾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었기에 후회를 하지 않았다.


육체의 질병이 가져다준 고통은 ‘자기에 대한 앎’에 대해 완전한 다른 길로 승우를 이끌었다. 승우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성공과 같이 남들이 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기도 하고 싶은 것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였다. 내면에서 만들어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자마자 자기도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답할 말이 없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자기에 대해 진지해져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젊은 시절을 직장에서 보내고 은퇴하는 중년들에게도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지 못해,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들 중년의 위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거창하지 않다. 사소하고 때론 유치하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억누르고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할 수 없는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나는 눈치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삶에 대해 만족하며 살아간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내가 보내는 시간에 대해, 내가 선택한 시간에 대해 존중해주기 때문에 가능했다.

누군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름을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지 않고 인정해주어야만 상대가 건강한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보지 않은 육체적 나이만 중년이 되어버린 어린자아들은 사회에서 은퇴를 하고서야 정신적 사춘기를 겪기 시작한다. 세상에 모든것은 다 때가 있는데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면의 구축 자체를 무화시키는 고통이 있다. 정도가 압도적인 고통, 결말이 죽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고통, 전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고통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런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앎에도 이르게 하지 못한다. 설혹 자기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 고통을 다루고 해결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전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고통.. 그저 버티기 밖에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고, 통제영역안에서 조절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 이상의 고통이 내게 찾아온다면, 사실 나도 별볼일 없이 무력감에 시달려 부정하고 분노할 것이다.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때 허무함을 느낀다. 지금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때, 사람은 완전히 절망하게 된다. 만사가 무의미해진다. 사람에게 이런 절망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이 절망의 핵심은 스스로가 겪고 있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조차 말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할 말도 없다는 데 있다. 말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안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무의미의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을 도울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만약 무의미의 고통에 빠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재희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이해하기 바랐다. 자기가 왜 이렇게 끊임없이 몸과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그게 얼마나 힘든지 말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을 하면 그 고통이 너무 별것 아닌 게 되어버려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다른 말로 설명해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보통 노인들이 다 겪고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고통이 되고 말았다. 재희 어머니는 그게 더 참을 수 없었다.

진정한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비롯되는 사회적 도태이다. 정신적으로 무리에서 분리되는 상황이 가장 불안한 것이다. 억울함, 자기고립은 선택이지만 본질적 원인은 무리에서의 분리이다.

무리와 붙어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말로 표현할수 없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정신적 분리이다.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에 화분이 많다면, 주인은 자연을 사랑하고 식물을 잘 돌볼 줄 아는 ‘금손’이거나 혹은 우울증이 빠져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 그 관계의 불가능성에 절망하고 체념한 사람들이 공동의 파트너로 손 내미는 것이 동식물, 새로운 반려다.

무리에서 분리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은 개인은 무리가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무리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사람이 아닌 무리는 본질적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의 무리속에서 얻을 수 있는 요소들의 절반도 얻을 수 없다.

대체로 삼는 대상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동.식물, 종교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에게는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 ‘방언’이다. 덕룡 아버지가 수행하는 ‘주문’ 역시 비슷하다. 방언과 주문은 일종의 ‘텅 빈 기표’ 역할을 한다. 말을 하는 것이긴 하되 그 말에 특정한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빈 밥그릇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입을 열고 그 말을 소리 내어 했다는 점이다. 그 ‘소리’에 내가 말할 수 없었던 그 ‘말’이 담긴다. 그 소리를 말로 듣는 것은 오로지 신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들릴 수 있는 말을 구사하는 사람이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이미 사회와 법에 기입된 언어로 말하는 사람만이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방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이 사람들의 말만 사회에서 들린다. 따라서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사회와 법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들이 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권력이나 쫓아다니는 얄팍한 행위로 보이게 된다.

무리속에 계급을 만들고 그 계급에서 통용되는 생걱과 언어를 통해 계급을 구분짓는다. 인간이라는 무리가 계급을 나누는 원리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난’이 될 때 사람은 비로소 무의미를 딛고 ‘겨우’ 일어나는 근거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적·역사적 가치를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거나 박탈당할 때 고통은 고난으로 전환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고통은 오롯이 개인이 혼자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된다. 고통의 당사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나누어야 하는 사회적·역사적 문제로 인식하지만 사회가 그것을 거부할 때, 그의 고통은 순전히 심리적 문제에 의해 발생하는 고통, 즉 ‘통증’에 불과한 것이 된다. 심지어 육체적 증거와 해법조차 없는 통증 말이다.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이때의 경청은 흔히 이야기하듯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주는 게 아니다.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그저 들어줄 뿐이죠.” 이런 말은 경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경청의 의미를 거스르는 말에 불과하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경청 역시 돌려주는 것re-이 있는 응답이어야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은 내가 그에게 돌려줄 게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사이에 집을 짓기 위한 경청은 응답이어야 한다. 응답이 아닌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어설픈 위로는 되려 개인에 대한 경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들음에서 끝나는 것은 경청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한 메시지의 교환은 경청이 아니다. 들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스마트폰은 사람사이의 의사소통을 경청이 아닌 들음에서 끝나도록 유도한다.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를 고립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약한 연결로 이어진 고리는 이해관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렇지 않게 끊어지고 서로에게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요즈음의 세대는 위와같은 약한 연결을 편하게 생각한다.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 놓고 약한 네트워크로 살아가는 것, 1인가구가 많아져가는 현 시대에 걸맞는 인적 네트워크 구성이라 볼 수 있다.

약한 연결이 많이 구성된 사회일수록 고통으로 인한 자기고립에 빠지는 사람이 점차 더 늘어날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정신적 식물인간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사회적 존재감과 곁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내적 존재감을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곁 없이 내적 존재감이 형성된다는 것은 닭 없이 달걀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사회가 갈수록 약한 네트워크로 인해 곁의 가치와 무게가 점점 약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겉으로 보이는 스펙은 훌륭하지만 내적 존재감이 없거나 바닥을 치는 사람들이 날로 많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잘 살고 있다’는 느끼고 확신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으로 내가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이익이 되며 이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 ‘남아도는 인생-잉여’ ‘쓰레기’ ‘버림받은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어떤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공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바로 이런 인정 체제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몸에 익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아무렇게나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려는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생들은 저절로 배우게 된다. 자기가 하는 어떤 일은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다른 일은 아무리 잘해도 성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정받는 성과를 잘 내는 학생들은 점점 더 고양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더욱더 위축된다.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거나 수업 시간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이 이 체제에서 더는 인정받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우치면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전형적인 약육강식의 단면이다. 자신의 신분에 걸맞는 대우와 인정을 받으려면 학생은 성적으로, 직장인은 성과로, 노인들은 자본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각 시기마다 인정받지 못할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며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라며 포기를 몸으로 배워 나간다.

현재를 포기하며 준비한 미래는 과연 언제 도래하는 것일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미래를 손으로 잡을 수 있을까? 미래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눈앞의 현재라면, 결국 사람은 현재에 같혀 사는 것인데 미래만을 바라보고 현재를 포기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

현재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보장되던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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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6 Words

2019-01-19 21: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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