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번째책] 상속의 역사 백승종

상속의역사-백승종

책속의 한구절

‘높은 세율 때문에 국내에서는 도무지 어떤 사업도 못하겠다’는 아우성과는 달리 법이 규정한 세금을 제대로 내는 부자는 거의 없다. 시민들이 기억하는 착한 기업은 ‘오뚜기식품’과 ‘유한양행’ 정도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악화일로에 있다. 그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쓴다.

현재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를 역사적으로 조망한다는 말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과거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원인을 밝혀본다는 뜻이다.

본질적인 원인을 파헤치다보면 해결방법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이해해야하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쩌다 그 사람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파악하려면 개인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볼 수밖에 없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져야 하는 과정은 저자가 보여주는 관점처럼 역사를 되돌아 보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접근방법이다.


문제는 해가 갈수록 양극화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위 1퍼센트의 부자는 연평균 소득이 3억 8120만 원으로, 하위 20퍼센트 소득계층의 연간 소득 647만 원보다 59배나 많다(2013년 5월 현재). 양극화 문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수준이다.

양극화의 문제에 대해 따지기 전에 양극화는 문제인 것인가? 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양극화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말한다.

부가 집중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사람의 능력이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경우가 있다.

성과를 위해 노력한 누군가는 정당한 대가를 보상받지 못하고, 타인의 노력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한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여 부당이득에 대한 재분배가 이뤄지지 않는다.

공평하지 못한 자원의 분배가 양극화가 문제인 본질적인 이유이다.

양극화가 한국은 부의 분배에 있어 공평하지 못하다. 고로 양극화는 해결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이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인구의 변화다.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만약 그때 사람들이 균분의 관습을 고집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땅은 늘지 않았는데 자꾸 나누다 보면 나중에는 모두가 가난해지고 말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상속제도를 변경하는 데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맏아들만이라도 일정한 재산을 물려받게 함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에 다른 상속제도의 변화, 이것은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도 때때로 목격되는 현상이었다.

한정된 자원을 통해 생존을 해야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내 몫’이 커지고 보장받기 원하는건 인지상정이다.

맏아들에게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게 했던 조선시대의 경우, 풍족하지 못하는 수준을 떠나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 속에서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으리라 이해가 된다.

이와같이 재산의 상속에 대한 사회적 규약이 없었다면, 조선사회는 상속재산을 두고 벌어지는 범죄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서양 사회는 계약서를 통해 크고 작은 인생사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유언장에 특히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식생활에 관한 부분이었다. 예컨대 우유는 일주일에 몇 리터나 제공할지, 버터와 치즈는 얼마만큼의 분량을 잡수게 할지, 또 고기요리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식탁에 올릴지도 미리 정해두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뚜렷하다. 서양의 경우 부모와 자식이 혈연으로 맺어진 사랑과 효의 관계라기 보다는 사회적 관계로서 서로의 책임과 의무를 분명히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의 한국사회도 사회적 관계로서 부모와 자식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젊은 세대에서 늘어나고 있으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가 일상에서 드러나고 있는 상태이다.

세대 간의 관점차이는 인류사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세대 갈등은 우선,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며,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동/서양의 관점 차이는 각각이 지니고 있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우월하거나 올바른 답이라고 할 수 없다. 선택과 이해의 문제이다.


서양에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문서가 있었다. 은퇴계약서(the retirement contract)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서류가 아예 없는 것 같은데, 근대 유럽에서는 도처에서 발견되는 문서다. 은퇴계약서는 주로 농촌지역에서 작성되었다. 자신의 명의로 경작지를 소유한 농부뿐만 아니라 소작농민도 이런 문서를 만들었다. 이 계약서가 완성되면, 노쇠한 농부는 자신의 경작지나 소작지를 아들(또는 딸)에게 맡기고 생업 전선에서 물러났다.


상속자가 가정경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처방이 따랐다. 부모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속권을 양도했다. 이때 피상속자(부모)에 대한 부양의무도 함께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라도 부모는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고 싶어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문제해결 방식일 것이다.

자식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상속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다. 와우.. 한국에서 만약 이런일이 발생했다면, 부모, 자식중에 누구의 잘못이라고 대중은 평가할까.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문화권에서는 자식에게 가혹한 부모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 않을까.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계약의 관계, 즉 사회적 개체로서 인식하기 때문에 상속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본다. 만약 자식과의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에서는 타인을 어떻게 믿고 상속권을 양도하느냐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부모 또한 상속권을 자식에게서 빼앗아 줄만큼 타인을 믿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지배적일 것이다.


20세기 전반이 되면 서구 여러 나라에서 농민연금법이 시행되었다. 이제 은퇴계약서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도시의 중산층도 유언장에 굳이 부양조건을 기록하지 않게 되었다. 연금제도가 보편화되자 천 년의 전통을 가진 부양계약서가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서양의 상속권 양도는 부모의 노후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이행의 주체가 핵심이다.

은퇴세대의 노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자녀에서 국가로 점차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상속권을 자식이 아닌 타인에게 의탁해야 할 만큼, 불안정했던 노후 대책이 국가가 나서서 보장하겠다고 한다면 국가는 국민들로부터 얻는 이득이 없을까?

연금제도가 가지는 단점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다만, 제도가 시행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노후 세대의 복지를 책임지겠다는 국가의 역할이 믿을만한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증명될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노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인간사회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국가채무가 급증하여, 노령연금이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21세기에 효도계약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아… 바로 위에서 염려했던 문제가 발생해버리다니……..이런…….

국가주도의 정책이 가지는 문제점은 국가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가 불가능 하다는 점..

국가에 의한 완벽한 노후 보장은 없다. 국민들이 가진 노후에 대한 불안심리를 이용해 국가가 국민에게서 합법적으로 자본을 위탁받은 것 뿐이다.

한국에서 제도적으로 정착된 국민연금 또한 20세기 서양국가에서 봉착했던 문제를 답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국가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국가기관의 움직임에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이유이다.


충선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된 성리학(유교)은 한국 사회를 서서히 그러나 일관된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효도가 사회적 책무로 자리 잡으면서 자식들의 부모 부양의무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을 통해 대중에 뿌리내린 문화는 국민들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현 사회의 인간의 생각은 교육기관을 통해 양산된 결과물이다.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정치인들이나 후손들이 어떻게 해서든 교과서에 기재된 자신이나 가문에 대한 대한 평가를 고치려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한국의 교육기관의 교육을 마친 성인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은 국가권력이 대중들에게 의도하고자 하는 방향성의 총합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마다 고민해봐야 할 것은, 교육기관에서 정규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전에,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효도를 사회적으로 강제할 장치가 없었던 유럽에서는 다른 수단이 등장했다. 유언장과 은퇴계약서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부자간의 계약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원만한 해결은 쉽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많은 잡음이 따랐다. 근대국가가 국민연금이란 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정든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바다로 떠나갔다. 18세기 한국에도 “돈이면 귀신도 움직인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주민들 중에는 부자가 되거나 출세할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과장은 금물이다. 도시로 몰려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패의 늪에 빠졌다.

‘성공’의 환상은 불안정한 환경의 사람들에게 신기루처럼 여겨지곤 한다. 한 두 명의 성공 스토리가 미끼가 되어 방향이 어딘지도 모른채 선두의 뒤만 쫓는 양떼와 같은 그룹들이 만들어진다.

너도나도 물불가리지 않고 쫓고 있는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다양한 각도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세상에는 공으로 얻어지는 것이 없다.

경제가 큰 폭으로 성장하는 격동의 시기에도 한 사람의 개인이 부자가 되는 데는 상속만큼 결정적인 요소는 없다. 한국 역사상 21세기처럼 경제활동의 기회와 종류가 다양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요즘처럼 개인의 의지와 능력에 따라서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자력으로 부자가 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현 시대의 한국사회에서 자력으로 부자가 되는 확률은 매우 낮다. 상속을 통해 부를 얻지 못했다고 인생을 한탄할 필요가 없다.

물질로는 얻을수 없는 것들을 얻어가면 된다. 내면, 취미, 능력, 의사소통 능력 등 부유한 삶에서 돈으로 충족될수 없는 영역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여 성취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수입이 있다면, 수입을 늘이는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삶의 요소요소들을 체험하고, 발견하며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맛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입양은 신분이나 지역, 계층을 초월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가계의 단절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성리학 이념이 사회 전반에 깊이 파고든 결과로, 예조에는 입양 신청이 쇄도했다. 예조는 연도순으로 심의결과를 정리하여 『계후등록繼後謄錄』이란 책자를 만들었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방대한 분량이다.

생물학적, 사회적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한 시대는 점차 지나고 있다. 가정을 꾸리기 위한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기 보다 개인의 삶에 행복을 우선하고 이를 완성해가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관이 되어가고 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입양보다는 결혼을 원치 않는 1인 가족에서 사회적 자녀를 갖기 위한 입양이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대부모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제도야말로 신자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미신적 수단이라고 공격했다. 대부모 제도가 완강했던 향촌사회에서는, 대자녀들이 구교(가톨릭)를 버리고 신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 사회는 나날이 세속화되었고, 대부모 제도 역시 관습의 일부가 되었다.

현시대의 한국에서는 교회라는 집단의 목회자가 대부모의 역할을 자처한다.

미신적 수단임을 알면서도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목회자의 대부모적 역할을 강조하며 성도들에게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직업군들 중에서도 목회자라는 직업이 천국에 가기에 가장 어려운 직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