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번째책] 다상담 일,정치,쫄지마편 강신주

다상담-강신주

오문오답

1)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 사회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라는 조직,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억압받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2)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 얼마전에 보았던 드라마 ‘SKY 캐슬’ 이 떠올랐다. 타인의 바램이 아닌 스스로 바로서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깨닫는다.

  • 9월이면 아이가 태어난다. 조직속에, 사회속에 타인의 기대대로 인생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로. 행복도, 불행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내는 아이로 키워내야 겠다.

3)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에서 시작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기보다. 나는 얼마나 인정에 목마르며,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타인의 인정에 얼마나 반응하는지 나의 내면부터 면밀히 살펴보아야 겠다.

  • 나의 내면을 바라보며 발견되는 모습에 괴로울 수 있지만,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계기로 여기며 계단을 끝까지 올라야 한다.

4) 다시 읽는다면 어느 부분을 제일 먼저 읽겠는가?

여러분은 일을 돈 되는 일과 돈 안 되는 일을 구분하고, 돈 안 되는 일은 다 죽여 버리잖아요. 돈 안 되는 일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즐거운 것인데 말예요.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얘야, 이 회사 아니면 못 먹고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너는 회사를 떠날 마지막 기회를 얻은 셈이야. 그러니 항상 가슴 한편에 사표 한 장을 써 넣고 회사에 다녀라. 그래야 당당해진다.

진보의 옷을 입고서 유명해진 사람은 약자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그 애정을 빙자로 자기가 유명해지고 싶은 거라고요. 정말 진보적인 사람은 우측으로 가지 않아요. 진보의 제스처를 취했던 사람이 우측으로 가는 건, 화장을 지우는 거죠.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부모님한테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사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님의 욕망대로 살았던 거예요. 남의 욕망대로 살면 노예이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 주인이죠. 어차피 주인은 이기적이란 말은 들어야 되는 거예요. 언젠가 여러분들도 나중에 부모님이 되어 자식에게 ‘넌 이기적이야’라고 할 때가 올 거예요. 아이가 독립적인 개체가 되었다는 느낌,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요.

5) 어떤 점을 배웠는가?

  • 강신주 라는 저자는 왜 이런 강의를 하고, 책까지 내게 되었을까. 생각하다보면 결국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누군가의 잘못을 까는게 즐거운게 아니라 그 사람이 진정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강신주. 멋있다.

책속의 한구절


“회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순간, 너는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 업무에 관한 네 입장이나 생각, 혹은 회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인 제안도 할 수 없을 거야. 당연히 너는 회사 상사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존재감이 없는 회사원이 되겠지. 어쩌면 그런 이유로 너는 정리해고 1순위가 될지도 몰라. 존재감이 없는 직원부터 정리해고를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얘야, 이 회사 아니면 못 먹고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너는 회사를 떠날 마지막 기회를 얻은 셈이야. 그러니 항상 가슴 한편에 사표 한 장을 써 넣고 회사에 다녀라. 그래야 당당해진다.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너는 회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소신 있는 회사원이 될 수 있어. 그럼 회사에서도 너를 함부로 대우하지 못 할 거다. 알겠니?”


죽을 때까지 명심해라. 어디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네게 우울한 삶이 펼쳐질 테니까. 항상 떠날 자유와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속내를 당당하게 피력할 수 있는 법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럴 때 남편도 그리고 자식도 너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거야. 행복하게 해 주어야, 아내가 그리고 엄마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이제 알겠니?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만이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고, 일을 제대로 소신껏 처리할 수 있고 인정도 받을 수 있단다.”


모든 것에 ‘예스’라고 하면 그 순간은 대충 모면할 수 있겠지만, 결국 무가치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회사의 CEO든 직장 상사든 무조건 그들의 말을 듣는 삶이 어떻게 살아 낼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정에서 시어머니, 남편, 혹은 아이의 말이라면 무조건 ‘예스’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국가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같은 권력자에게 무조건 ‘예스’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정하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수행하는 삶은 주인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노예는 항상 ‘예스’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주인은 ‘노’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지요. 물론 ‘노’라고 할 수 있기에 주인은 진정한 의미의 ‘예스’, 그러니까 다른 어떤 것에도 쫄지 않고 ‘예스’를 이야기할 수 있지요.


명심하세요. 용기가 먼저 있어서 ‘노’라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노’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사람들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재벌이 되려고 하고, 이건희가 그렇게 난리를 해서 아들인 이재용한테 돈을 주려고 하는 건, 일 안 하고 먹으라는 거예요. 나쁜 새끼들이죠. 그게 신분사회인 거예요. 우리는 지금 신분사회에 살고 있어요. 돈으로 처발라서 자기 자식들 대학 보내잖아요.


백장 스님이 왜 죽을 때까지 일을 했어요? 수행의 공동체에서는 모두 다 일하는 거예요. 무위도식하는 놈이 없어야 된다고요. 그러려면 누가 먼저 해야겠어요? 병장이 먼저 해야 되잖아요. 병장이 막 삽질을 해야 상병도 삽질을 하는 거죠. 그런데 상병은 삽질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이 짬밥에 아직도 삽질해야 되냐’라면서요. 그러니 상병은 병장만 들여보내면 되는 겁니다. 그러고 자기는 일 안 하겠다는 거죠. 백장 스님은 그걸 안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일을 한다, 죽을 때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본이 나중에 원할 것 같은 스펙과 관련된 일들이 되면서 일을 부정하게 되는 거죠. 어차피 나의 일이 아니라 자본이 요구하는 일이니, 일 자체를 무가치하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죠. 그래서 일을 긍정적으로 하려면 자본주의의 강도가 지금처럼 세지면 안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가 세지면 세질수록 일은 돈보다 열등한 것으로 전락할 테니까요.


여러분은 일을 돈 되는 일과 돈 안 되는 일을 구분하고, 돈 안 되는 일은 다 죽여 버리잖아요. 돈 안 되는 일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즐거운 것인데 말예요. ‘내가 원하는 일들을 어떻게 찾을까?’, 이게 지금 문제인 거예요. 주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려고 돈을 내잖아요. 그런데 진짜 웃긴 게, 대학교에 가면 좋아하는 과목을 안 들어요. 여러분들 좋아하는 과목 들은 적 있어요?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서 들은 수업 있어요? 돈을 냈으면 향유하고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등록금을 내자마자 일이 복잡해져요. 누구를 위한 등록금인가요? 정확하게는 자본가들을 위한 등록금이에요. 여러분들은 그 비싼 돈을 가지고 뭘 배워요? 여러분이 원하는 걸 배워요? 자본이 원하는 걸 배우잖아요. 자본이 원하는 걸 배워야 취업이 된다는 이유로요. 노예 훈련소죠. 최고급 노예들이 명문대에 있어요. 병신들이에요, 병신들. 물론 비싸게는 팔리죠. 그래서 아예 대학을 못가서 취업이 안 된 분들은 자유로운 거예요.


회사에서 여러분의 에너지를 다 쓰지 마세요. 주인의 일에 에너지를 모두 쓰지 말아요. 회사에서 에너지를 쓰면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직장 다니시는 분들,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뭔지 아시겠죠? 회사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그 모든 에너지를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거예요. 보고 싶은 연극을 보세요. 연극 봐서 피곤하니까 그 다음날 오전에 출근해서 또 잘 쉬어요. 하지만 완전히 들키지는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고용도 촉진돼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효율이 안 오르면, 또 사람을 뽑아요.


미팅하거나 상사들이랑 회의할 때 있죠? 그거는 상사들이 해야 될 거 결정해 온 거예요. 회의는 민주주의를 흉내 내는 거죠. 그런데 회의할 때 반론 같은 거 제기하는 아마추어들이 있어요.(웃음) 거기서 왜 에너지를 낭비합니까?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그걸 기뻐하세요. 회의 들어가면 내 일 안 해도 되잖아요? 조금만 더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회의가 너무 빨리 끝날 거 같으면 그때 돼서 조심스럽게 안건 하나 내는 거죠. 시간 얼마 안 걸리는 안건 같은 거 던져 주고요. 이렇게 사세요. 목숨 걸지 말고요. 아셨죠?


한 사회가 얼마나 나쁜지의 척도는 노동시간의 길이입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노동을 더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개인이 향유하는 시간을 줄이는 사회는 나쁜 사회예요.


중요한 건 이거예요. 나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라고요. 제일 허무한 게 이런 거예요. 일을 너무나 열심히 하는 노예라서 자기자식이나 자기 가족도 못 돌보면 정말 완벽한 노예죠. “이 일 안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사랑이에요. 우리가 자본에 저항할 수 있는 건 사랑 아닌가요? 사랑할 시간, 향유할 시간을 왜 빼앗겨요. ‘너희들이 뭔데 뺏어!’라고 저항해야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취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 되니까 저항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없으면 동력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찾을지 우리가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팀원들이나 나나 향유하는 시간 때문에 노동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을 하셔야 해요. 그런데 본인은 일을 열심히 하잖아요. 에너지를 일에 다 쓰는 거죠. 그런데 팀원들은 에너지를 다 안 쓰니까 그게 못마땅하신 겁니다. 그들을 본인처럼 만들지 마시고, 본인이 그들처럼 되세요. 그런 팀장이 되세요. 직장 상사가 일을 열심히 하면, 후배들이 퇴근을 못 해요. 잔소리 안 하고 일 열심히 하는 상사가 제일 무서워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솔선수범하는 사람이거든요. 그게 압력이에요. 팀원들 편하게 해 주려면 팀원들 있을 때 농땡이 부리는 척하다가 팀원들 나간 다음에 본인 일을 하세요. 상사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데이트를 나가겠어요? 잔소리를 안 하신다고 했는데, 잔소리보다 더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시는 거예요.


누군가 빠졌을 때 그 사람 대신 그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상대방한테 부채감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해요. 그럼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걸로 느껴져요. 좋은 마음으로 하신 일이지만 팀원들은 그렇게 읽을 거란 말이에요. 팀원들이 보기엔 너무 완전한 팀장인 거죠. 완전한 신처럼. 그러니 거리가 멀 수밖에요.


일을 하다 보니까 에너지가 방전되고, 그러면 가족이랑 지내는 시간이 점점 힘들어지고, 회사에 있는 게 더 편해져요. 그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일을 줄이셔야 해요. 일을 줄이고 에너지를 세이브해서 집에 가셔서 남편이랑 아이와의 관계를 복원하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본인이 계속 일에 탐닉하면 팀원들도 향유하는 시간 다 버리고 본인처럼 노동만 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부지불식간에 압박을 받는 거지요. 그래서 욕먹는 거예요. 향유하는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팀장이 된다면 분명 존경받는 팀장이 될 겁니다.


직장에 정착하지 못하는 건, 병이 아닙니다. 욕심이 있는 거죠. 매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해요. 왜 일하는 노예가 주인의 집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찾아요? 다행히도 본인은 향유하는 시간이 중요하고 좋다는 의식은 갖고 있습니다. 행복해야 된다는 것. 직장을 이렇게 자주 옮기는 건 굉장히 당당하고 용기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쫄아서 못하잖아요.


향유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연봉이 높은 정규직이라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향유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면 차라리 아르바이트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정규직이면 뭐해요? 밤새도록 야근하고 돈을 많이 벌면 뭐하냐고요. 그 돈으로 향유할 시간도 없는데 말예요. 다 정규직에서 일한다는 허영뿐이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생존과 향유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일자리를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향유할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우리가 자본가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나의 일을 돈이 되는 일과 돈이 안 되는 일로 스스로 나누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버렸던 겁니다. 그 죗값을 지금 치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본이 원하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또 사냥을 떠나면 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향유이자 동시에 노동이기도 한 사람이겠죠. 제작하고 창조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죠. 홀로 하는 직업일 때만 가능해요.


아무쪼록 잘 살아서 나중에 눈감을 때 ‘참 재밌었다’며 돌아가셔야 돼요. 내세를 기대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기대하는 삶 말고 지금 여기에 젖과 꿀이 흐르도록 합시다. 항상 이걸 명심하자고요


산업자본이 신제품으로 만든 새로운 시간 차이가 바로 ‘유행’이지요. 유행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 인간의 허영을 매우 강하게 자극합니다. 새로운 옷을 입거나 새로운 차를 몰 때, 우리는 자신보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이나 차를 가진 사람을 보고 우월하다는 느낌을 갖기 쉬우니까요. 유행을 선도하는 산업자본은 살아남아 번성할 테지만, 그렇지 않고 한때의 영화에 취해 있는 산업자본은 무자비하게 도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계기인 기술혁신은 산업자본으로서는 사활을 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분업화의 논리가 중요한 관건으로 대두합니다. 그렇지만 분업화는 전문화의 과정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전문화가 더 유리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산업자본의 내적 메커니즘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을 포함한 연구기관도 세분화되고 더 효율적으로 전문화된 인력을 양산하는 방향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우지간 10개를 한꺼번에 연구하는 것보다 1개만을 연구할 때, 기술혁신은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산업자본이 발달할수록 종합적이며 전인적인 교육, 혹은 인문학적 교육은 와해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산업자본은 분업 체계의 한 구석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교육을 선호하니까 말입니다.


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것에 젬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하나에 능숙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는 서툴다는 것을 함축하니까요. 그러니 아이들과 노는 것, 아내와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 심지어 가족과 함께 공연장에서 연주에 몸을 맡기는 것, 어느 것 하나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항상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일밖에 없고, 그래서 일할 때 편안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마침내 우리는 구제할 수도 없는 워커홀릭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왜 한국인은 죽도록 일만 하는가?’ 이제야 우리는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일만 했던 오래된 독재의 경험, 그리고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일자리 자체를 지상의 가치로 만들었던 산업자본의 압력.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를 강화시키면서 우리를 워커홀릭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마침내 일만 하는 가축과도 같은 삶이 탄생했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향유의 시간은 철저하게 망각되어 버린 겁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진정한 덕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 사랑하고 창조하는 시간, 즉 향유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보수 정당은 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죠?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라는 건 인문학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에요.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처불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는 겁니다. 보수 정당에서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을 계속 사용하는 건, 자유가 자본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서 ‘민주주의’는 멋진 레토릭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그냥 자유주의예요.


우리를 제외한 사람들, 아파트 좀 가지고 있고 땅 좀 가지고 있고 주식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공약을 점검한다고요. 여러분들은 공약으로 판단 안 하죠? 우리는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게 심각한 겁니다. 왜 사람들이 투표를 안 하는지 알아요? 왜 무관심할까요? 가진 게 없으니 지킬 게 없는 거예요.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이 사회에서 누가 정치에 가장 민감하겠어요? 가진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투표나 정치에 대한 열망은, 기업을 소유한 사람이 가진 열망의 백 분의 일도 안 될 거예요. 이러니 게임이 되겠어요?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란 말 들어 봤나요? 아주 저주스러운 개념이에요. 민주주의라고 하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라는 건데, 그 앞에 사회라는 개념을 떡하니 붙이는 순간 이미 분배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공정한 분배자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현대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정권의 정당성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나는 공정한 분배자이기에 정권을 잡는 것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웃기지 않아요? 우리 개개인들이 주인이 아니라 분배자라는 존재가 우리한테 분배를 한다는 생각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으로 긍정되는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인데 말이죠


국가라는 형식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고,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기구예요. 국가가 민주주의에 반한다는 건 수탈이 강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국가라는 형식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의 실현은 먼일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철학자들은 최종적 민주주의는 국가의 철폐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거고요. 이런 엄격한 잣대에서 민주주의는 아직 실현된 적이 없죠.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는 것은 국민, 신하, 부하로서의 생각인 거예요. 우리는 순진하게 리더 한 명이 있고, 그 리더가 좋으면 잘 따라가고, 그러면 조직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죠? 이끄는 사람이 따르는 사람을 위해 주고, 따르는 사람이 리더를 믿는 기묘한 그림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야 해요. 민주주의 국가니까 우리에게 주인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절대 양보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고요.


임제臨濟라는 스님이 있어요. 이 스님이 남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 자유인이 된다는 거죠.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돼요. 멘토는 무슨 멘토예요? 자신이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자꾸 멘토를 찾아서 지침을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멘토의 지침을 계속 찾으면 우리는 계속 멍청해지는 거예요. 스스로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비겁하게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거라고요.


진보와 보수라는 걸 유명세나 권력을 얻기 위해서 입는 옷으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거예요. 아마추어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 무슨 소린지 알죠? 변희재 씨가 좋아했던 건, 유명해지는 거였어요. 아주 단순한 겁니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줄 때, 허영이 나옵니다. 유명해지고 싶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러니 진보주의자들이 오른쪽으로 간다는 건 우리가 고마워할 일이죠. 드디어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로 우리한테 온 거니까요.


어쨌든 우리가 상처를 받더라도 알아야 됩니다. 진보의 옷을 입고서 유명해진 사람은 약자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그 애정을 빙자로 자기가 유명해지고 싶은 거라고요. 정말 진보적인 사람은 우측으로 가지 않아요. 진보의 제스처를 취했던 사람이 우측으로 가는 건, 화장을 지우는 거죠. 그런데 이거 고마운 일이에요. 몰랐으면 김지하 시인 죽고 나서 묘지에 갈 뻔했던 거죠. 이제 안 가도 되잖아요? 돈도 아끼고 얼마나 좋아요?(


여섯 명 정도 모여서 중국 요리 시켜 먹었던 적 있죠? 그런데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셋, 짬뽕이 둘, 볶음밥이 한 명이에요. 직접민주주의는 뭐냐면 그냥 시키는 거예요. 짜장면 셋, 짬뽕 둘, 볶음밥 하나, 이렇게요. 대의민주주의는 뭐예요? 일단은 볶음밥을 제거해야 돼요. 그러고 나서 투표를 하게 되면 과반수가 되죠. 과반수가 되면 다 짜장면을 먹는 거예요. 독재라는 건 볶음밥을 먹겠다는 사람이 선배라서 다 볶음밥을 먹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그렇게 해 봤자 좋은 건 중국집 주인이죠. 그냥 다 시키는 게 직접민주주의이자, 진정한 민주주의죠.


가끔 진보를 자처하는 인물들 중에 이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 얼핏 비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이 진짜 진보적인지 아닌지 그때 여러분이 알 수 있어요. ‘아, 저 인간은 높은 자리에 올라 관심받고 싶은 게 목적이구나’라는 걸 알 수 있죠. 진보의 슬로건은 여섯 글자예요. ‘사랑 때문이다.’ 이웃, 가난한 자, 우리 후손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진보가 아니에요. 그냥 여러분들이 읽었던 책,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의 가치와 신념을 따르는 거죠. 그게 보수예요.


고수하는 거예요. 근사하게 챙겨서 버젓하게 제사를 지낸 효자라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부모님께 잘해 드릴 때 있죠? 여러 사람에게 보이게 선물 사 드리고 나는 효자라고 뿌듯해 하는 거요. 어머니가 진짜 좋아했던 걸 해 드린 적 있어요? 거꾸로 부모님도 마찬가지죠. 자식이 서울대를 가면 서울대를 보낸 부모라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어요. 자식을 사랑한다고 볼 수 없죠. 관념과 방법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사람은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거예요. 불변의 진리죠.


아이들은 기득권이 없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진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보수 세력들이 청소년들에게 선거권을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무서운 결과가 나올 테니까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선거권을 주면 그들도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내부의 온당한 문제 제기에 맞서 자꾸 외부의 적을 들먹이는 사람들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내부의 건강한 비판을 외부의 적을 이용해 심지어는 외부를 적으로 만들어서라도 무마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만약 북한과 우리의 관계가 평화로우면, 우리는 내부의 문제로 관심을 쏟게 됩니다. 분단된 국가의 더럽고도 서러운 공식이 있죠. 우리 체제가 민주화가 되면 북한과의 적대관계가 완화되고, 우리 체제가 반민주적이고 권위적으로 돌아가면 북한과의 대립이 강화된다는 거죠.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고 쫄게 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싸우는 방법은 뻔뻔함이에요. 뻔뻔해져야 돼요. 여기 상담 신청하신 분들은 모두 순수해요. 왜 뻔뻔한 걸 선택하지 않죠?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뻔뻔해요. 여러분도 뻔뻔해 보여야 돼요. 이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먼저 말씀을 드릴게요. ‘쪼는 것의 반대는 뻔뻔함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당당해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 하나를 얻는 겁니다. 뻔뻔할 수 있겠죠? 이게 해결의 실마리예요.


공식처럼 외워 두세요. 누군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 항상 찔린다면, 여러분은 약자인 거고 그 사람은 강자인 거예요. 이걸 실천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약자가 강자 앞에서 뻔뻔스럽게 마치 문학가처럼 거짓말을 할 때, 약자는 강자를 가지고 놀 수도 있는 당당함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강자 앞에서 약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쿨하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이때 진실을 이야기하면 강자는 우리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고 할 테니까요.


여러분을 쫄게 만드는 대상들은 대개 뻔뻔해요. 거꾸로 얘기해 보면 여러분들이 ‘밥’이라는 거예요.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보다 더 뻔뻔해지는 겁니다. 싸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당당해하지 마세요. 왜 당당하려고 해요? 권력자한테 당당하게 굴면 훅 가는 거예요. 권력자를 이기는 방법은 뻔뻔해지는 거예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게릴라를 생각하면 편해요. 상대방과 맞짱 뜰 수 없기에 게릴라가 되는 것 아닌가요?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강하면, 힘이 생길 때까지 우리는 게릴라가 되어야 해요. 적의 무기로 싸우고, 적의 식량을 축내고, 적의 옷을 입는 겁니다. 뻔뻔스럽게. 마치 적이 아닌 것처럼 태연한 모습으로요.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 충분히 적과 맞짱 뜰 수 있는 순간에 게릴라는 뻔뻔스러움 대신 당당함을 갖추게 될 겁니다.


2000년 전에 중국에 철학자 송견宋銒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테마는 견모불욕見侮不辱이에요.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또 핵심적이죠.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트위터를 할 때 사람들이 이상한 멘션 보내면 상처받죠. 페이스북에서 ‘너 쓰레기지?’ 이런 얘기를 들으면 모욕감을 느끼잖아요? 여러분들은 사랑받고 싶어 하고 관심받고 싶어 하시죠. 예쁜 사람이고 싶고, 고상하고 싶고, 순수하고 싶고요. 우리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칭찬해 주면 훅 넘어갈 사람들인 거죠. 그게 거짓된 칭찬이어도요. 이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예요. 그래서 누군가 칭찬해 주면 좋고, 누군가 칭찬 안 할 거 같으면 쫄죠.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 생겨납니다.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왜 인정받으려고 그래요? 진짜 위대한 인격은 뻔뻔스러운 거라니까요? 인정받으려는 사람은 항상 정직하려고 한다고요. 많은 우화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고 그러죠. 사실이에요


‘싫어’, ‘못 가’, ‘미안’ 이러면 돼요. 이러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죠. 이러다가 인간관계 깨진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질질 끌려다녀요. 그렇게 안 하는 방법은 성급하게 ‘예스’라고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봤을 때 이분은 약한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다 맞춰 주니까 본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거죠. 다 나를 편하게 만나요. 내가 만만한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 반, 나를 싫어하는 사람 반’이어야 잘 사는 거예요. 아셨죠?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남 말하기 좋아해요. 사람들은 남의 불행으로 자양분을 얻으면서 자기 행복을 영위하거든요. 주변에 친구들 잘 보세요. 나보다 힘들게 사는 친구 한 명은 꼭 있지 않나요? 그 아이를 만나면 희망이 생기지 않던가요? ‘나는 그래도 살 만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먹고살거든요. 다 그러고들 사는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인간은 서로를 알아야 한다’라는 판타지, 정직함의 판타지가 우리의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든다고요. 사람들에게 일하는 시간은 대개 고역이에요. 문제는 ‘그 고초를 겪고 직장에서 나왔을 때 내가 행복할 수 있는지’라는 거죠.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기 위한 건데 일하는 곳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결국 직장 안과 직장 밖을 정확하게 분리해야 되는 거죠. 직장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면서 동시에 돈도 벌려고 해서 그래요. 절대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 뻔뻔스럽게 대하고 세계와 단절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에 쫄지 않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뻔뻔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애인을 가질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노’라고 하셔야 돼요. ‘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예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노’를 못 하는 사람은 ‘예스’를 못 해요. 죽을 때까지요. ‘예스’의 배경은 항상 ‘노’여야 해요. 어떤 사람이 계속 ‘싫어’라고 얘기했다가 언젠가 ‘좋아’라고 한다면 진짜 좋은 거예요. 그런데 계속 좋다고만 한다면, 그 사람이 상태가 안 좋거나 성인군자인 거죠. 그런 사람은 데리고 있으면 안 돼요. ‘노’라고 하는 사람만이 ‘예스’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머릿속에 항상 넣어 놓으셔야 돼요. 나는 얼마나 ‘노’라고 하고 있는지를요.


여러분이 불행할 때 친구들이 모일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불행을 보면서 나는 그 불행에 빠지지 않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려고 모이는 거예요. ‘나는 얘보다 낫다. 남편과 사이는 좋지 않지만 이혼하지는 않았으니까’라는 이상한 자부심으로 불행한 자기 집으로 귀가할 친구들이에요. 진짜 친구는, 여러분들이 행복했을 때 질투하지 않고 오는 친구들이에요. 지금 우리들의 친구 관계는 다 해체해야 돼요. 고통의 공동체 같은 거예요. 인간은 다 그래요. 불행을 좋아해요. 불행을 안주거리로 삼고요.


부모님한테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사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님의 욕망대로 살았던 거예요. 남의 욕망대로 살면 노예이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 주인이죠. 어차피 주인은 이기적이란 말은 들어야 되는 거예요. 언젠가 여러분들도 나중에 부모님이 되어 자식에게 ‘넌 이기적이야’라고 할 때가 올 거예요. 아이가 독립적인 개체가 되었다는 느낌,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요.


‘노’라고 한다는 건 무언가를 정말로 하지 말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지금 이분은 윗사람들한테 ‘노’라고는 하지만, 부정했던 그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이게 진짜 문제죠. 그게 여기 있는 후배들한테 투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윗사람들이 시키는 그 부당한 일을 하면, 나는 나의 비굴한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후배들한테 그걸 또 강요하게 됩니다. 이러면 정말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혼자만의 비겁을 모든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는 심각한 사태가 생기니까요.


자본가는 게임가예요. 도박에 빠진 사람들을 본 적 있어요? 경마장이나 경륜장에서 도박을 끝내고 좀비처럼 나오는 그들을 본 적 있어요? 그들이 여행을 가기 위해, 아파트를 사기 위해 그렇게 하나요? 순간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희열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이건희와 같은 대재벌이 여러분처럼 무엇을 사고 싶어서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희나 도박증독자는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문제는 여러분들도 돈을 모으다가 중독이 되면, 궁극적인 귀결이 대재벌이나 도박사의 경지로 간다는 거예요.


‘뻔뻔하다’는 말의 긍정성을 아셔야 된다는 거예요. 이건 소중한 거예요. 뻔뻔하게 굴고 거짓말 같은 걸 잘 하세요. 거짓말, 얼마나 좋아요? 다들 인정받기를 원하니 거짓말을 툭툭 던져 줘요. ‘너 예쁘다. 너는 훌륭하다.’ 여러분들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시고요. 죽을 때까지 인정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시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