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번째책] 딴짓해도 괜찮아 장재용

딴짓해도괜찮아-장재용

오문오답

1)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 꿈을 쫓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고난은 시작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쫓기 위한 선택을 멈추지 말아라.

2)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 저자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나는 누구인가, 내 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삶에는 없었다.

  • 사회가, 한국의 교육계가 원하는 맞춤형 인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꿈을 말하고, 꿈을 이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언론이나 책을 통해 지켜보긴 했지만, 그들처럼 나의 심장을 뛰게하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꿈은 아직까지 없었다.

  • 영화의 클라이막스 같은 삶이 아니라 인간극장 같은 다큐속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잇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내겐 더 즐거움이었다.

3)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 히말라야 원정대에 합류하기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정말 인간의 한계까지 몰고가는 한국에서의 훈련모습이 가장 인상깊다.

4) 다시 읽는다면 어느 부분을 제일 먼저 읽겠는가?

  • 히말라야를 오르며 저자가 정상까지 오르도록, 지금의 저자가 있게 해준 은인들의 일방적인 헌신과 도움이 그려진 부분을 먼저 읽을 것 같다.

5) 어떤 점을 배웠는가?

  • 저자에게 산이 있다면, 나에게는 마라톤이 있다. 올해 풀코스 마라톤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해발 8천미터에서 박살나버린 발목을 끌며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해낸 저자를 생각하며, 힘든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집 평수보다는 사유의 지평을, 자동차 배기량보다는 꿈이 주는 마력을 믿는다. 산을 사랑하지만 태어난 곳은 사방이 바다인 섬이다. 에델바이스를 좋아한다. 빙벽과 바위를 오르는 C급 알피니스트다. 대기업 기획 담당, 경영 혁신을 주관하는 부서의 팀장으로 일하다 최근 글로벌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능력이 해외에서도 먹히는지 즐겁게 실험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월급이다. 월급은 침 흘리며 자는 내 아이 입에 밥을 먹여 주고 외출을 준비하는 아내의 붉은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 준다. 내 새끼 목마른 입에 프리미엄 초코우유도 부어 준다. 조건의 인간에게 그리고 한 사람의 아비에게 제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보다 구체적인 건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월급은 그 어떤 힘보다 강하고 엄숙하다. 나를 살리고 내 가족을 살리는 밥과 월급이 나오는 삶의 현장인 직장은 그래서 숭고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월급쟁이에게 직장은 악몽이다.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문제의 본질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반복의 지겨움, 지시에의 굴종,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보탤 것도 없이 월급은 이를 잘 견딘 보상이다. ‘회사인간’에게는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달을 잘 버티는 게 중요하다.


인간은 늘 밥 너머의 일을 사유했고 그것을 규명하려 애썼다. 자신의 피와 살을 뛰어넘는 물리성과 정신성을 찾아 헤맸다. 삶을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상정할 수 있는 자기 인생의 의제설정력을 가지고 불나방처럼 자신의 꿈을 좇았다. 기꺼이 불행을 찾아 나섰다. 불행으로 떠나는 모험의 힘으로 인류의 역사는 면면히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이어져 왔다. 살기 위해 죽이고 또 죽인 것을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 그 지난한 밥숟갈 위에 삶을 반추하고, 가끔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자신을 가져다 놓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초라한 과거와 과감하게 이별하고 새로운 삶을 재편해 나가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죽음의 두려움과 밥의 일상성을 깨뜨리면서도 더 높은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멈출 수 없다. 이것이 흔히 ‘꿈’이라 일컬어지고 또 비현실적이라 치부되는 거의 모든 일이다. 스리랑카 출신의 세계적인 미술사가 아난다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의 말은 절묘하다.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도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우리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대책 없이 직장을 떠난 월급쟁이와 그 가족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곳은 없다. 밥은 물리적 파괴력을 지닌다. 간지 있게 처분할 대상이 아니고 함부로 폄하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꿈은 삶 밖에 있지 않다. 삶 밖으로 내던져도 안 된다. 밥에 굴종하지 않는 어엿한 존재가 되기 위해선 삶에 꼭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월급쟁이인 우리는 직장을 떠나 살 수 없으므로 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사람은 직장을 다니며 이루어 낼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게 내 생각이다.


직장에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모두가 핏기 없는 얼굴로 모였다. 회의다. 회의란 닦달하는 상사의 물음에 맑게 닦인 목소리로 지체 없이 대답해야 하는 약식의 업무 책문이다. 이 자리에서 날아오는 질문에 어물거리거나 묻는 자의 심중을 꿰뚫지 못할 경우 상사의 눈썹은 날카롭게 치켜 올려지고 게임은 끝이 난다. 직장인은 여기서 자신의 능력 전부를 평가받는다. 무능과 유능은 먼 데 있지 않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충성심이 뚝뚝 떨어지는 자는 유능하고 그런 분위기가 정나미 떨어져 침묵하는 자는 무능하다

회사는 인간의 조직이다. 이성적인 조직이 아니다. 상사의 의중대로 움직이는 것이 회사다. 그 이상 그 이하도 하지말자.


권위와 지위를 가진 자들이 점잔을 빼고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 앞에서 최고의 자리를 향해 꿈을 가질 것을 설파한다. 너희도 ‘별’을 달아야 하지 않겠냐며 임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각종 복리 후생과 입이 떡 벌어지는 혜택들을 핏대 세우고 침을 튀겨 가며 설명한다. 이들의 결론을 늘 ‘그러니 윗사람 말 잘 듣고 시킨 대로 열심히 해라’다. 신입사원들은 연사가 아니라 권위와 지위가 하는 말에 주눅 들어 집단적인 자기최면에 걸린다.


발목이 산산이 부러진 이후로 흰 산에 대한 떨림은 떨림으로 그쳤다. 내 다리의 뼈가 끊어짐과 동시에 나를 우주와 연결시켜 주는 꿈이라는 네트워크도 끊어져 버렸다. 부러진 발목으로 산은커녕 회사도 제대로 다니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회사 구내식당에서는 동료가 식판에 밥과 반찬을 아침 점심으로 받아 주었다. 그들은 멀쩡했으므로 가끔 그들의 말없는 호의를 동정과 경멸로 오인하기도 했다.


사람은 뼈가 부러져 죽는 게 아니라 절망으로 죽는다. 절망은 지옥의 말이다. 언제나 오는 오늘로 인해 세상은 희망을 말하지만 그 오늘이 지금의 오늘이 아니라 허황된 내일의 오늘, 지나간 어제의 오늘이 될 때 우리는 절망의 보균자가 된다. ‘바로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다면 그건 오늘을 허송하는 것이다. 다리가 부러졌든 희망이 사라졌든 나는 역사상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살아야 했다. 과거가 늘 오늘을 지배했기에 절망의 바이러스가 서식하기 좋은 숙주가 됐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모든 곳이 지옥으로 감염돼 갔다. 이것이 절망의 실체였고 절망의 날들이 내 삶을 지배해 간 메커니즘이었다.


나를 가둔 사람은 나였다. 여전히 청춘이었지만 늙은 문장으로 마음의 노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발목은 부러졌지만 여전히 내 등뼈는 곧추세워져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발목은 산산조각 났으나 단단한 허벅지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음을 알지 못했다. 매일의 오늘을 부러진 발목으로만 살았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아 보려 했는가. 나에게 남아 있는 날 중 가장 젊은 날, 바로 오늘, 그것을 시작하리라. 내 꿈을 세상에 내놓고 세상과 멋지게 한판 붙어 보리라.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부지불식간에 타올랐다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는 불덩이를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좋다. 나는 계약한다. 내가 원정에 참여하는 대가로 잃어야 할 것이 있다면 잃겠다. 그러나 지금, 여러 사람에게 공언하진 말자. 대신 혼자 조용히 준비를 시작하겠다. 내가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2박 3일 동안 쉬지 않고 읊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현실에 질식당하던 내 꿈.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을 걱정하여 자신은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봉우리 밑에서 차를 끊이며 기다리는, 사람 때문에 간다. 배고픈 겨울, 한 가닥 뜨거운 라면을 후배에게 양보하는, 사람 때문이다. 살을 에는 추위에 자신의 장갑을 벗어 후배 손에 끼워 주는, 사람 때문에 간다. 지긋지긋한 산길, 힘든 오르막, 아픈 내리막, 생각하기도 싫다. 살을 찢는 바람, 잠도 쫓아 버리는 추위는 어떤가. 그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 밥도 먹히지 않고, 먹더라도 들여보낸 족족 토해 내는 그곳에 다시 가면 내가 성을 간다. 그렇지만 기진한 제 몸을 던져 쓰러진 후배를 끌고 내려오는, 그 사람들이 다시 산에 간다고 나설 땐 나도 가는 수밖에 없다. 안 갈 도리가 없다.


세상의 값싼 가치에 털려 버린 나에게 산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경쟁에 내몰리고 저항 없이 살아가는 삶에서 일탈하라고 나를 부추긴다. 나를 깊이 선동하는 붉은 산들이 있다. 바삐 돌아가는 직장과 시간이 멈춘 듯한 산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산은 어떤 시간으로 살아야 할지를 알려 준다. 그런데 절대 직선으로 말하지 않고 언제나 에두른다. 휘휘 돌아 올라 숨겨 놓은 메시지를 깨닫게 된다. 침묵하는 선지자의 넓은 등판을 보는 것 같다. 노자의 『도덕경』 45장에는 대변약눌(大辯若訥)이라는 말이 나온다. ‘빼어난 말솜씨를 가진 이는 사물에 따라서만 말하고 자기가 지어낸 것이 없는지라 오히려 어눌해 보인다’는 의미인데, 산이 꼭 그렇다.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길, 에두르고 어눌한 듯하지만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 그 끝은 언제나 첨단. 산의 모든 길은 이렇다.


떠남은 원초적 유혹이다.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무언가에 대한 기대다. 이 기대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유혹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유혹에 넘어가 홀연히 떠난 이들의 역사다.


훈련은 쉽지 않았다. 혼자 하는 훈련은 외로웠고 혹독했다. 폐활량을 높이기 위해 출근하기 전 새벽에 찬물을 가르고 머리를 물에 박았다. 잠영 연습을 수도 없이 그리고 매일 했다. 회사를 마치면 10킬로미터 오르막을 일주일에 두 번 뛰었다. 쉬지 않고 뛰어오르면 가슴 깊은 곳에서 피 맛이 올라온다. 심장이 터지며 구토가 나왔다. 누가 시킨 거라면 단 하루도 그리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었을 것 같다.


현실과 맞버티며 승리를 예감할 무렵, 아내는 세 살배기 아들의 온몸에 퍼진 아토피와 싸우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울며 보채는 아픈 자식과 씨름하다 지쳐 누운 아내를 본다. 여전히 흥건한 땀이 그 수고를 말해 주고, 목덜미에 찰싹 붙은 머리카락이 처연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아내는 늘 나를 지지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아내는 그곳이 사지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그곳에 결국 가게 되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제 남편이 떠나려는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아내도 참으로 많이 보아 왔다. 다리가 부러져 고함치며 응급실로 들어설 때 아내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내 손을 붙잡지 않았나.


철저히 허구로 치장된 히말라야의 모습에 돈을 처바른 결과는 죽음이다. 산을 상업화시킨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혹독한 시그널이다. 돈으로 히말라야를 사는 건 히말라야에서 극기와 탐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히말라야에 오르려면 동료의 죽음을 보듬고 동상으로 까맣게 변한 발을 씻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눈사태 속에서 동료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떨어진 크레바스 속으로 제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히말라야에 등반 시즌이 찾아왔다. 매년 상업 등반대의 사망자가 늘어 간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 250여 명에 이른다.


8,000미터에서 바라보인 붉은 황혼, 붉고 푸른 전리층의 전쟁, 천둥같이 각인된 붉은 아름다움은 가히 지구가 숨겨 놓은 풍광이라 생각할 만했다. 히말라야 고소의 적막 한복판에서 법열에 잠겨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천년을 머물렀다는 저 고대의 인도 바라문 승은 얍삽했다. 조물주가 혼자 즐기는 비경을 엿보았던 것이다. 아, 죽어도 좋으리. 날씨가 다시 좋아졌다. 오후 8시를 갓 넘기자 등반대장인 벽래 형은 정상 공격을 명령했다. 우리는 득달같이 텐트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두운 밤, 벽래 형은 출발 직전 마지막 영상 기록을 남긴 뒤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오를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정상 직전.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기계처럼 뚜벅뚜벅 걷는다.


사람들이 가지 않은 오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길에 들어서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자신의 길로 선택한 평범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문제를 풀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자기라는 오지를 풀어 가는 첫 번째 출발지다. 나라는 오지, 나라는 수수께끼, ‘나’라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나’라는 사람이 걸어간 오지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다. - 스승 구본형이 나에게


자신이 과거에 했던 업무는 탁월했고 지금, 과거 자신과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꼰대들이 회사에는 많다. 그때는 모든 것이 좋았고 지금은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봐줄 수 없는 노회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대가 아니길 바란다. 과거에 붙들리면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다. 봉우리는 봉우리만의 난해함을 가진다. 에베레스트를 생각하고 그보다 낮은 디날리를 물로 보다간 큰 코 다친다. 날고 기던 산악 영웅들은 디날리에서 죄다 운명을 달리했다. 디날리는 산악 영웅들의 무덤이다. 북극권 거봉에는 습한 돌풍이 분다. 히말라야의 마른 바람을 예견하여 오르면 낭패를 본다.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


정신적으로 신을 대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을 만난 사람의 대가는 치명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내지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마라’, ‘역량을 길러 도전해라’, ‘신중함이 실패를 줄인다’, ‘경험을 다져야 한다’, ‘상황을 알고 처신해라’ 등의 듣기 거북한 좋은 말을 죄다 끌어 붙여 교훈으로 삼는다. 파에톤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고 얘기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젠체하며 들려주는 교훈은 내게 매력이 없다. 시시하다. 위의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풀어내고 싶다. 사람들의 생각과 조금 다르지만 나는 다음의 이유로 이 신화가 좋다.


나를 옥죄던 일상에 대한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때 삶은 경이로워진다. 그것은 마침내 반대로 걸어가게 하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샛길로 빠지게 한다. 자신만의 샛길을 가진 개인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풍요롭다. 샛길 막다른 끝에 나타나는 웅장한 폭포를 상상하라. 그리하여 에베레스트로 가는 월급쟁이가 나오고 시인이 된 배달원, 소설을 쓰는 행정가, 그림을 그리는 미화원들이 쏟아지는 장면을 즐겁게 지켜볼 것이다. 조그마한 벽도 오르지 마라 막아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조언을 듣지 않기로 한다. 알고 보면 그 벽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는 나는 누군가? 질문은 꽤 긴 시간 나를 괴롭혔다. 밤을 새워 책을 뒤적거렸고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묻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고전, 옛사람들의 말과 글은 힘이 셌다. 단번에 내가 왜 사는지 번뜩 알 것 같기도 했다. 대답을 잡았다 싶을 때가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미궁의 시작이었다. 그때마다 다시 모든 대답을 뒤집어엎어야 했고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 생각했더니 이내 얍삽하게 웃으며 삶 속에서 유유히 빠져나갔다. 질문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아마 죽기 직전까지 답을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굳이 답을 얻어야 할 필요도 없다. 살아 있는 것, 내 등짝에 햇살 받으며 사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임을 알게 된 것, 이 짧고 얕은 결론이 오랜 질문의 시간을 지내 온 궁핍한 소득이다.


산에 간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다. 쓸모없는 짓으로 내 인생의 쓸모는 커졌다. 쓸모없는 일들을 할수록 나는 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쓸데없는 일은 반드시 쓸모를 생산한다. 죽는 줄 뻔히 알면서 뛰어드는 무모한 자들이 있다. 출산을 앞둔 어미가 그렇고 기를 쓰고 높은 산을 오르는 산재이들이 그렇다. 단지 과정에 지나지 않을 행위들에 죽음을 불사하고 덤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 무모한 도전이 나는 왜 이리 매력적인가


히말라야에서 걸을 때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잔걸음을 걷더라도 멈추지 않고 걷는 게 중요하다. 사실 넓은 보폭으로 크게 걸을 수도 없지만 아장아장 걸으며 쉬지 않고 가는 게 결국 제일 빨리 걷는 방법이다. 한 번 쉬어 버리거나 멈추게 되면 하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