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번째책] 나는 3D다 배상민

나는3D다-배상민

오문오답

1)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고민이 지금의 저자가 위치까지 이끌었다.

  • 직업적 성취 후에는 자신의 능력과 에너지를 나눔이라는 통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 아무 생각없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무게가 버겁지만, 가치있고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다.

2)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지, 어떤 태도와 가치관으로 일하는지가 인생의 가치와 무게를 결정한다.

  • 걸작을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가치있는, 인류에 유산으로 남을 만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자세로 업무를 대한다면, 생각하는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을까.

3)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 스마트 디자인이라는 회사에서 몇주간 회사직원인척, 무작정 쳐들어가 생활하는 모습.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일에 주저함 없이 결정하고 이뤄내는 실천력이 대단하다.

  • 젊은이들에게 어설프게 봉사하지말고, 실력을 갖추고 자신의 재능을 펼쳐낼 수 있는, 꾸준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봉사를 준비하고

4) 다시 읽는다면 어느 부분을 제일 먼저 읽겠는가?

  • 제3국가에 열악한 환경에서 말라리아의 위험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모기 스프레이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던 부분.

5) 어떤 점을 배웠는가?

  • 궁하면 통한다. 간절함이 걸작을 만들어 낸다.

  • 꿈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 다만 꿈에 대한 간절함의 크기만큼 결실의 크기와 가치가 결정된다.

  • 저자는 간절했다. 발버둥 쳤기에 기회가 주어졌고, 관찰하고, 질문하고, 사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 노력은 재능을 이겨낸다는 저자의 조언. 만화가 이현세가 떠오른다.

‘나는 행복한가?’ 그 근본적인 질문 앞에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뉴욕의 유명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도 대단한 클라이언트들의 칭찬도,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소비주의 문화의 부속품으로 사는 일은 공허하고 무의미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 내가 이룬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더 가치 있는 디자인, 90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다자인, 인간애를 실천할 수 있는 디자인,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디자인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하여 내가 선택한 곳은 내 고향이자 디자인의 변방 대한민국이었다.


꿈 Dream 많은 청춘들이 꿈이 뭐냐는 질문 앞에 머뭇거린다. 나는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꿈을 모른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꿈을 가지려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과 뉴욕 생활이 내게 가르친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라는 요구와 다름이 없었다.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고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는 일. 이것은 누구도 알려주거나 대신해줄 수 없다. 자신을 알아야 꿈도 삶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디자인 Design 더 이상 디자인은 예술이나 상업의 테두리에 있지 않다. 남이 알려주는 해답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그래서 디자인은 창의력과 직결되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창의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묻지만, 순간의 창의력은 무수한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사색으로 나타난다. 관찰하고 질문하고 생각하기. 그 모든 과정이 밑받침되었을 때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즉 창의력이 생긴다.


나눔 Donate 세상엔 눈앞에 보이는 인과관계와 손익관계를 벗어나는 거대한 법칙이 있다. 내가 수많은 기회와 행운의 땅이었던 뉴욕을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 이유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나눔의 정신’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세상에는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제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일단 두꺼운 영화사 책을 한 권 샀다. 거장들의 작품과 성향이 연대별로 자세히 소개된 책이었다. 나는 그것을 지침서 삼아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부터 연대별로 감상했다. 처음엔 친숙한 할리우드 영화로 시작했지만 곧 유럽 영화와 아시아권 영화로 지평이 넓어졌다. 영화를 볼 때는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아이디어를 메모했으며, 영화에 나오는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코드를 함께 공부했다. 처음엔 복장 터지게 진도가 느린 것 같았지만 얼마 후에는 고전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트렌드와 그 사회를 지배했던 사고방식을 짚어낼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나만의 색깔. 그것은 비단 그 교수님의 요구만은 아니었다. 문화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독학을 하고, 살아있는 지식을 체득하기 위해 길거리 공부를 하다 보니 그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수많은 문제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낯선 언어에 위축감이 들었던 것도, 친구들의 작품을 힐끗거렸던 것도, 교수님의 한마디에 우왕좌왕했던 것도, 모두 나만의 관점을 만들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관찰은 보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것이다. 뉴턴이 눈앞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어? 이 사과 맛있겠네’ 하고 아작아작 사과나 먹었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리 없다.


요즘 한국 사회는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경쟁력, 남의 눈에 그럴싸해 보이는 스펙을 강요한다. 적성엔 맞지 않지만 성적과 시류에 따라 선택한 학과,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놓으면 유리할 것 같은 학위와 자격증들. 그런 것을 가져야 치열한 경쟁에서 버틸 수 있다고 인간 구실하며 살 수 있다고, 사회 전체가 젊은이들을 세뇌시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의도된 경쟁력이나 스펙이 얼마나 갈까 나는 의문스럽다. 내면의 요구보다 타인의 요구에 부합하고자 만들어진 그것들은 언젠가 한계나 회의에 부딪칠 것이다. 남들이 토플 공부를 하니 나도 영어학원을 다닌다. 남들이 어학연수를 가니 나도 일단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나는 한 사람의 경쟁력이 그렇게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한밤중, 불 꺼진 학교에서 3D 프로그램을 독학할 때 이것으로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취업을 할 때 더 높은 고지에 서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것이 내 꿈과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학교에 가기 전, 나는 매일 거울 앞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뉴욕 최고의 디자이너입니다.I’m the best designer in New York City.” 지금 내가 그렇게 말하는 상대는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뉴욕 유명 디자인 회사의 임원들 앞에서, 또는 대형 클라이언트 앞에서, 그렇게 나 자신을 소개할 것이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다니는 동안 내가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던 이 말은 얼핏 거만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 자부심의 표현이자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 그리고 나에게 가하는 채찍질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 저 말을 되뇌고 난 뒤 나는 자문했다. ‘상민, 너 오늘 하루도 저 말이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할 수 있지?’ 매일 저녁 똑같은 말을 한 뒤 나는 또 나 자신에게 물었다. ‘상민, 넌 오늘도 뉴욕 최고의 디자이너로 자부할 만큼 후회 없는 하루를 보냈어?’


그들에게 내 열정의 이유와 홍익인간의 정신, ‘가문을 빛내고 민족을 영광되게 하라’는 가르침은 한마디로 올드패션이었다. 엄청나게 촌스럽고 구시대적인 발상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만난 파슨스 친구들은 나와 똑같은 마흔 줄이 되어있었다. 개중에는 ‘좋으니까’란 한마디로 나를 열등감에 빠뜨렸던 친구들도 있었다. 이런저런 안부가 오간 뒤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상민, 그땐 네가 정말 촌스럽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네가 옳았어. 난 마흔을 넘긴 지금도 디자인을 ‘즐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그것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 또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내가 촌스러웠을지는 모르지만 틀리지는 않았다고. 디자인을 즐겼던 친구들과 디자인에 목숨 걸었던 나는 전혀 다른 청춘의 한때를 보냈다. 나는 밤낮없이 디자인에 매달렸지만 친구들은 낮에는 디자인을 하고 밤에는 다른 일, 다른 즐거움을 찾았다. 나는 매순간 열정의 이유를 되새겼고 열정에 수반되는 고통을 견디느라 모양새가 빠졌지만 그들은 뚜렷한 목표나 열정의 이유보다는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흔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치열하게 견디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즐거움도 치열함 앞에 올 수는 없다. 치열함 없이 즐기는 것만으로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시간들 그래서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 자신과 싸울 때 비로소 꿈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즐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고불변의 진리,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한국 사회에는 대놓고 돈 이야기 하는 것을 경박하게 여기는 정서가 없지 않지만 내가 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프로페셔널의 세계는 철저하게 돈과 실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학생일 때는 실수도 할 수 있고 방황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회사는 무능한 직원에게 절대 공짜 월급을 주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능력이 곧 몸값이다.


디자인에 정답은 없지만 평가는 분명히 존재한다. 평가의 기준은 세 가지인데 첫째, 기능성이다. 이는 이성적 판단과 논리적인 결정이 가능한 부분인데, 제품의 목적인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한다. 디자인의 상업성marketability, 내구성durability, 생산가능성feasibility이 이 영역에 속한다. 둘째로는 아름다워야 한다. 물론 미의 기준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특정 기준을 근거로 한 절대미가 아닌 그 제품이 요구하는 최선의 미라는 것은 판단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론 상징성이 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스토리라든지 감성적인 컨텍스트context, 사회적 이슈 등과 같은 상징성이 있으면 더 좋은 디자인이라 볼 수 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에이스로 뽑혔다는 자만 때문에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내 판단과 선택을 믿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선배 디자이너들 앞에서 그야말로 납작 엎드렸다.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했고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의 말이면 진심으로 귀담아 들었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자 선배들이 변화무쌍한 뉴욕 디자인 업계에서 어떻게 10년 이상을 버텼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재들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내가 감탄하고 놀라워했던 제품들을 직접 만든 능력자들이었고 디자인 업계의 역사와 변화를 주도한 산 증인들이었다. 눈을 뜨자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에서 그럴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귀를 열자 그들이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태도를 바꾸자 그제야 사람의 진심이 보였다. 늘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독일인 선배도 사실은 표현이 투박할 뿐 속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제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내가 제품 하나를 디자인하는 데에는 대략 3개월 정도가 소요되는 것 같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아이디어가 발전하는 경우다. 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는 찰나에 얻어진다. 의외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의 대부분이 그렇다. 물론 영감의 순간이 거저 찾아오지는 않는다. 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을 그만두려 해도 저절로 생각날 만큼 그 문제에 몰두하기. 그러다 보면 문득 번개를 맞은 것처럼 아이디어가 번쩍하면서 0.1초의 창조적 직관력이 번뜩이는 찰나를 맞이하게 된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수준의 감을 타고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뛰어난 감을, 어떤 사람은 남보다 떨어지는 감을 가지고 있다. 그 차이는 결과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저 노력만으로 작품을 디자인하는 사람은 뛰어난 감각을 겸비한 사람의 작품을 보며 망연자실할 것이다. 노력만으로 감이 뛰어난 경쟁자를 따라잡기란 요원해 보인다. 마치 출발선이 다른 경쟁을 하고 있는 듯 피해 의식마저 든다. 그러다 보면 열등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경쟁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진다.


나는 감각 또한 개발하고 학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재능이 없다는 타인의 냉혹한 평가, 자기 스스로 느끼는 불안과 불신에도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무명 생활도 견뎌야 한다. 혜성처럼 나타나는 감 뛰어난 동료들에게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일희일비하지 않는 꾸준함으로 묵묵히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감 떨어지는 그(혹은 그녀)는 분명 일취월장한다. 내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역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도 A양도 B군도 우리 모두는 결국 고만고만한 존재들이다. 학창시절 반짝이는 별은 아니었지만 느림보 거북이처럼 꾸준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하늘 위의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때 묵묵히 땅 위에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남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재능보다 뛰어난 실력은 오로지 노력뿐이다.


창조적인 생각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연결되어 등장하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시각적 자료를 이용한 반복 연습을 통해 안목 키우기,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감성과 철학, 위트와 유머 쌓기, 이외에도 일상의 수많은 다양한 체험을 통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아이디어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동안 쌓아왔던 지식과 정보들이 한 궤로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 1만 원 이상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30퍼센트? 40퍼센트? 하루 1만 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 10퍼센트가 채 안 된다. 나머지 90퍼센트는 하루에 2천 원 정도를 쓴다. 의식주 말고도 인간의 모든 사회 활동을 포함한 액수다. 하지만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아름답고 잘 팔리는 제품, 즉 10퍼센트의 소비자만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데 매달려 있다. 생산과 판매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은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갭과 톰스 슈즈 그리고 스타벅스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소비자는 기업의 경제 활동에 뒷짐이나 지고 있다가 수동적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존재가 아니다. 현명하고 똑똑한 소비로 기업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는 존재다. 공정하지 못한 거래를 하는 나쁜 기업에게는 나쁜 여론으로 불이익을 줄 수도 있고 착한 기업에는 더 많은 구매를 통해 공익 활동을 늘리도록 만들 수도 있다.


굿 디자인의 세 가지 요건은 기능function, 미학aesthetics, 상징symbol이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제품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사용의 불편함이나 안전성의 문제가 없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면 더욱 좋다. 미학은 아름다움의 측면이며 디자인의 기본이다. 아름다움은 주관성이 강하지만 디자이너는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건으로 제품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상징의 형식은 내러티브일 수도 스토리텔링일 수도 있다.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제품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디자이너가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상을 연달아 마흔일곱 번이나 받은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수상이 거듭될수록 나는 더욱 겸허해진다. 내 명예와 행복을 위해 디자인을 했던 시절,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서 싸웠던 시간들……. 10퍼센트의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구매하는 물건들을 만드는 데 몰두해있던 그 시절에는 세계적인 권위의 이 상들이 그 무엇보다도 탐났다. 하지만 세상은 크게 보는 만큼 더 크게 열리고 나누는 만큼 풍요로운 결실을 안겨준다. 뉴욕이라는 디자인 메카에 살며 최고의 환경에서 일할 때도 세계 유수의 디자인 공모전 입상 경험은 한 번이었다. 그런데 나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지난 시절 그토록 애써도 얻기 힘들던 상들을 줄줄이 수상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고 싶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금 당장 아프리카로 떠날 필요는 없다. 가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도 휴학을 하고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겠다는 아이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잔뜩 야단을 친다. 보통 제3세계로 봉사활동을 떠나는 사람들은 종교 단체나 기관을 통해 간다. 안타깝게도 그 봉사활동의 대부분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현실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노래를 부르고 함께 놀아주며 사탕을 나눠주는 친절한 언니 오빠들. 아프리카 아이들이 잠깐 즐거워하긴 하겠으나 그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나마 그렇게 한 번 왔다 가선 평생 다시 찾아오지도 않는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일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죽을 때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야 할까? 아니다. 그런 일은 아무도 할 수 없다. 누군가는 무조건 구원의 손길을 뻗고 다른 누군가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선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진짜 그들을 돕고 싶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마침내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것이 진짜 나눔이다.


나는 인생의 시기마다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려면 나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공부하고 노력하고 재능을 단련해 정말 필요한 순간에 그들이 원하는 그대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 많은 것이 미완인 20대에는 그렇게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힘들다. 20대가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간다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깨달음을 얻는 데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일회적인 봉사활동은,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의 힐링을 위한 자기위안과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디자인을 해야만, 아프리카를 가야만, 나눔을 실천하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긍휼한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나눔을 실천할 기회가 참으로 많다.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사회는 더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환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혜택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단지 눈앞의 혜택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더 큰 시야로 세상을 보자. 나눔이야말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자기 계발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우리 삶의 기본이며 정말 중요한 것인지, 이웃과 삶을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모든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내가 나눔을 실천하고 내 재능을 기부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는 내게 뛰어난 디자이너나 유명한 교수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네가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생각해봐라”고 하시며 교수라는 자리가 돈과 명예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닌 학생들을 가르치고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되살려주셨다. 그런 어머니이니 다른 곳에 가서도 자식 자랑 한마디 입에 담지 않으셨다.


돈을 많이 벌어도 사람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루에 세 끼 먹던 식사를 네 끼, 다섯 끼 먹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돈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돈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것이 명예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하지만 디자이너와 교수로 나름대로 유명세와 명망을 얻고 보니 그것도 그뿐이었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방송에 얼굴이 나갔지만 그것으로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은 것은 물론 나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삶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나눔이었다. 세상 90퍼센트 사람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일,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 그렇게 10퍼센트에 속한 사람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작은 톱니바퀴. 그것이 바로 나눔이다. 미세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초침을 움직이고 분침을 움직이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움직임으로 거대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