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번째책] 말센스 셀레스트 헤들리

말센스-셀레스트헤들리

오문오답

1)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 말을 잘한다는 것은, 내뱉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잘듣는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 성공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화속에서 상대에게 인정받기 위한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 대화의 스킬을 무장하는 것보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내려놓는 내면의 변화가 먼저 필요하다.

2)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 책에서 이야기하는 실수를 일상에서 모두하고 있는 것 같다.

  • 대화에 주인공이 되고싶어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던지, 어렴풋이 아는 내용을 말한다던지..

  • 상대에게 공감하기 보다, 내가 경험한 사실만을 전달한다던지.. 등등

3)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 공감하는 듣기를 통해 매출이 성장한 회사의 사례

4) 다시 읽는다면 어느 부분을 제일 먼저 읽겠는가?

  • 말실수하지 않고, 중요한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들을 설명한 부분.

5) 어떤 점을 배웠는가?

  • 나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대화의 주인공이 되려는 인정욕구결핍이 가져다주는 폐해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 결국 잘못된 대화는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시작된다.

  • 무조건 이런이런 것을 고쳐서 대화해야지를 접근하는 것 보다. 어떻게 해서든 타인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의 자세부터 고쳐먹어야 겠다.

책속의 한구절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다. 우리는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친하고, 가장 많은 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서로 함께한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하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악행을 저질러도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지만,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고 많은 대화를 나눴던 사람으로부터는 약간의 비틀린 말만으로도 크게 상처를 받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받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상처받기가 싫어서 상대에게 기대를 품지 않는 것도 자기방어에 한가지 방법이다.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부모 외에 타인에게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웬만한 일로는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다.

세상에 완전하거나 완벽한 것은 없다. 사람도 똑같다. 친구든 연인이든 배우자이든 사제지간이든 모든 관계는 틀어지게 마련이다. 인생의 소망을 관계에 두는 순간부터 절망은 시작된다.


상대에게 어떤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곧바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라도 우리는 그 친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의 처지를 내 경험과 비교하는 것은 더 좋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흔히 하는 실수 중에 하나이다. 답을 빨리 찾아내기 위해 상대의 의견보다 나의 대안을 먼저 얘기하곤 한다.


대화에서 스킬이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는 건 똑똑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당신은 가끔 무척 말도 잘하고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는 것도 많고, 매우 논리적이며, 말도 유창하다. 그런데 그들과의 대화가 즐거웠는가?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왜?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할 뿐 내 얘기를 경청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척하지만, 결국 내가 말을 주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무의미한 자기자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어도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내가 그녀와 공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내가 행한 건, 그녀의 고통에서 관심을 끌어와 나에게 집중시킨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고, 내게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친구와 나눔으로써 상실감을 극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는커녕, 내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상실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내 자신의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로 맞받아쳤는지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면서 자신의 경험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인정해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사회학자인 찰스 더버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대화 속에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향을 ‘대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칭했다. 이 성향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대화를 이끌면서, 대화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고자 하는 욕망으로, 스스로는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요즘들어 의도적으로 대화속에 나를 주인공으로 삼으려는 억지스러운 대화가 많았다. 나 또한 내가 왜 이러지 후회했던 적도 있다. 대화 나르시시즘. 인정받기 위한 욕구를 대화속에서 펼쳐내는 것이다.

듣자. 귀를 더 열고 입을 더 닫자.


전환 반응은 대화 나르시시즘의 주된 특징이다. 전환 반응은 관심의 초점을 끊임없이 자신을 향하도록 한다. 반대로 지지 반응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지 반응은 내가 지금 상대의 말을 듣고 있고, 계속해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할 때, 우리의 두뇌는 자동적으로 비슷한 경험에 대한 기억들을 훑고 지나간다고 한다. 어쩌면 관심을 자신의 경험으로 되돌리려는 성향은 사실 매우 자연스런 본능이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그 어떤 다른 주제보다 그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대화할 때 말하는 시간의 약 60% 가량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쓴다고 한다. 게다가 나머지 40% 또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방이 아닌 제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쓴다.


“정말 비참해. 너무 걱정이 돼서 속이 쓰릴 지경이야” 그런데 이때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당신 자신의 좋은 기분을 기준으로 삼아 이렇게 대꾸할지도 모른다. “걱정 마, 괜찮을 거야. 나도 6년 전에 해고당한 적이 있지만 별 문제 없었어.” 당신이 더 편안하면 편안할수록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그만큼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신경과학자인 타이나 싱어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 파트너의 부정적 경험을 실제보다 덜 심각하게 평가한다. 반면, 방금 불쾌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자기 파트너의 긍정적 경험을 실제보다 덜 좋게 평가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고 난 후,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본능을 줄이고 상대방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나는 더 적게 말하고 더 많이 듣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대화의 초점을 나에게 되돌리는 행위는 상대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해를 끼칠 가능성이 더 높다. 대화 중에 내 자신과 관련된 얘기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 때문에 대화가 방해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들이 ‘입은 다물되 귀는 열어두라’고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일까?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카토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보다 좋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말한다.”


왜 사람들은 누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길게 설명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수다를 떨고 싶기 때문일까? 수다를 떨고 싶다면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되지 굳이 왜 남의 상황까지 끌어들여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일종의 통제 본능이다. 누군가에게 충고나 조언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통제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 것에 대해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부모이거나 선생님이거나 직장 상사다. 그들은 자식과 학생과 부하 직원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또 다른 이유는 관심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친구 관계에서도 충고나 조언을 유독 많이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관심이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친구라 할 수 있다.

상황, 조직, 사람 모든것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들이 있다. 누군가를 조언, 충고하는 본연의 마음에는 상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숨겨져 있다.

상대를 통제하는 욕구의 근원은 인정받고싶은 마음이다.

인정받고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은, 자기 내면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면이 무너져 인정받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은, 누구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평생 그렇게 살아가라고 내비둬야 한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나보다 교육을 덜 받았거나 지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관이 나만큼 원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더 좋은 학교를 다니고, 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더 개방적이고, 더 열려 있을 거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더 똑똑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편견에 더 잘 빠진다. 한 연구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도리어 인지 능력이 뛰어날수록 편견의 사각지대가 더 넓은 것으로 밝혀졌다.”

인지능력이 뛰어날수록 편견의 사각지대가 넓다. 유명 정치인, 지식인들의 학업적 성취는 상위 1%에 해당할만큼 높은 편이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그들의 헛소리들은 가히 헛발짓에 가깝도록 편협하다.

교육을 얼마나 받았느냐가 아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했느냐가 중요하다.

성숙은 어떻게 이룰수 있을까? 겸손한 마음과 멈추지 않는 배움에 있지 않을까.


조지아주립대학과 미시간대학에서 수행된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뜨거운 정치적 이슈와 관련된 일련의 가짜뉴스를 제공해주었다. 그런 뒤 그들은 피험자들에게 그 가짜 기사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해주는 정확한 뉴스 기사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진짜 뉴스 기사를 읽은 뒤, 먼저 읽은 가짜 뉴스를 도리어 더 강하게 신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현상을 역류 효과라고 한다. 무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는 점을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원래의 그릇된 신념에 더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대화에 임하기 전에, 특히 당신 자신과 다른 신념을 지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라. ‘이 대화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길 바라는가?’ ‘대화가 끝날 무렵 어떤 기분을 느끼길 바라는가?’ 아마도 당신은 상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목표는 당신 자신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대화를 통해 상대가 얻게 될 혜택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당신 스스로 얻게 될 혜택은 결정할 수 있다.


당신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확고하든 간에, 모든 대화에서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보기 바란다. “혹시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은 건 아닐까? 그들은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까?”

상대가 왜 그런 생각을 할까를 고민하려면, 내 생각의 여지가 열려 있어야 한다. 나의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감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상대가 나에게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의견 그 자체로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의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거절당하는데 익숙치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매일같이 그들을 만난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진솔하고 정중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과연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복잡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겠는가?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 박사는 자기 자신을 옆에 내려놓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대화 상대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점점 더 경계를 풀면서, 자기 마음의 심연을 상대에게 기꺼이 털어놓으려 할 것이다.” 내가 20여 년 동안 저널리스트 생활을 하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이것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가르쳐줄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견해를 납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대화를 활용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놓쳐왔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솔직한 고백을 통해 신뢰를 얻고 정직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신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도미노피자의 광고 캠페인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회사의 겸손함과 솔직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고, 누구나 잘못을 (더구나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나 지식 부족을 인정하는 것이 약점을 시인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런 태도는 상대와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대화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고 싶은 욕구를 뿌리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라고 강력히 권한다. 아주 약간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다.

대화에 제외되는 것이 두려워, 사실인지 검증되지 않은 어렴풋이 아는 사실을 가지고 상대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후-


위대한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위험한 짓은 조금만 배우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거나 특정한 주제에 대해 실제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똑똑하다고 생각해주길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덜 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단어의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거창한 용어를 사용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가식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어떠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그 일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일상적인 상황으로까지 이어져 우리들 대부분은 작은 도움이라도 받길 꺼려 한다(그래서 심지어 길을 물어보는 것조차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학생도 아닌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구하는 일이 불편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건 마치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를 인정하지 않거나,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당신은 결국 친구나 동료들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단순히 그냥 듣는 것인 ‘수동적으로 듣는 것hearing’은 어렵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해하고 반응하고 기억하는 ‘능동적으로 듣는 것listening’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제대로 듣지 못하는 무능력은 개개인의 성격적 결함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인간적 성향일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소통을 방해하는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는 더 그렇다.


우리는 말을 하려는 성향을 타고났다. 말하기는 사실 유용하기도 하다. 말하기는 우리의 정체성을 강화해줄 수 있으며 심지어는 즐겁게 만들어 준다. 최근 하버드의 과학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두뇌의 쾌락 중추를 활성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하버드대 연구자들은 실험에서 참가자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섹스와 코카인, 설탕과 같은 것에 반응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섹스를 하거나 초콜릿을 먹을 때와 유사한 쾌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실험에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참가자들이 누군가를 앞에 두고 자기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 혼잣말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저 혼자서 중얼거렸을 뿐인데도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럼 이러한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대화의 성공 여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대화를 끝낸 다음 ‘해냈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못한 경험을 가끔씩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느낌을 토대로 대화의 성공 여부를 판단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행위를 통해 분비된 도파민에 미혹을 당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보를 소비하는 방식은 우리의 듣기 능력을 더 심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온라인으로 글을 읽을 때는 수많은 사진과 비디오, 링크들이 정신을 압도하는 만큼, 우리의 두뇌는 적당히 훑어보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우리의 눈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키워드와 요점을 찾아다닌다. 우리는 세부 내용과 글의 어조를 적당히 무시하면서, 두뇌가 자료의 정수라고 인지하는 내용들만을 주워 담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대화는 오랫동안 편집할 시간이 없다. 편집은커녕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즉각적으로 내뱉기 바쁘다. 이러니 당연히 실수가 많아질 수밖에. 그렇다면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이것이다. 최대한 말을 짧게 하고, 중간 중간 짧게라도 생각할(편집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말실수를 줄이기위해 말을 짧게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습관으로 만들어보자.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말을 길게 늘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그렇게 하고, 어떤 사람은 상대가 오해할지 몰라서 그렇게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일리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는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해력이 떨어지지도 않고, 무식하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다.


나는 일터에서 직원들을 내 사무실로 불러 모을 때 구체적인 한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해 왔다. 회의를 할 때는 미리 작성해둔 목록을 보면서 그 내용들에 관해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한 뒤, 질문이 있는지 물어보고 다음 내용으로 바로 넘어갔다. 내가 이 훈련을 시작한 이후부터, 직원들은 회의 시간도 더 잘 맞추었고, 회의 내용에도 더 깊이 집중했다. 또, 그들은 더 긍정적인 태도로 회의에 임했다.


의사소통 전문가인 앨런 웨이스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려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대화를 시작하기 전, 대화를 통해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일단 메시지를 다 전달했다면, 계속해서 말을 하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을 해야 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화에서도 중요한 건 양이 아닌 질이다.


정신과 의사인 마크 고울스톤은 대화 상황에서 40초 이상 말을 늘어놓을 경우, 대화가 일방적인 독백으로 변질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처음 20초를 녹색 신호등에 비유한다. 그 20초 동안에는 서로가 호감을 가지고 상대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20초는 노란 신호등이다. 20초가 지나면 듣는 이는 점점 흥미를 잃게 되고 상대방의 말이 너무 장황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40초가 되는 순간 빨간 신호등이 켜진다. 더 이상 듣는 이는 상대의 말을 듣고 있지 않거나 건성으로 듣는다. 말을 중단해야 할 때인 것이다.


사람들이 횡설수설하게 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주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즐거운 일인 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초조함을 느낄 때도 말을 과도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불안감이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도록 당사자를 부추기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특정 주제에 관한 자신의 폭넓은 지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수많은 말을 쏟아놓는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듣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침묵을 불편해하기 때문에 말을 과도하게 한다.


나는, 내가 부정적인 피드백을 얼마나 자주 반복하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하고 있음을, 그런 나의 태도가 직원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대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누군가가 어떤 내용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하면 듣는 동안 머릿속에서 ‘나도 알아. 나도 알아. 나도 알아’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상대의 말을 처음으로 들을 때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듣다 보면 의미가 둔탁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중요한 정보를 반복하는 행위는, 그 정보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 정보를 그냥 무시해버리기 쉽게 만든다고 한다.


상대의 무반응에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하기보다는 2초에서 3초 정도 멈추고 생각해 보는 습관을 들이자. 그리고 상대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내가 습관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잘못된 습관을 가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징후일 수도 있다. 새롭게 더할 말은 없지만 대화를 계속해서 주도해 나가려는 심리인 것이다. 직장에서는 이런 일이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 모두는 말을 계속하고 싶어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에 했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직장 동료나 상사를 수시로 만난다.


현대인들이 많이 앓고 있는 정신과 질환 중의 하나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처럼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질환이다. 대화가 주제에서 자꾸 벗어나고 끊기는 것 또한 이런 질환과 비슷하다. 이것이 과잉행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의력이 결핍된 것만은 분명하다.


질 좋은 의사소통은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준다. 의사소통 능력이 탁월한 리더가 이끄는 기업은 평범한 리더들이 운영하는 기업보다 거의 50퍼센트나 더 높은 수익을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대 소매상인 베스트바이는 사내 의사소통과 관련된 심층 연구를 진행한 바 있는데, 여기서 얻어낸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 중 하나는, 의사소통을 통해 직원 참여도를 1퍼센트 높일 때마다 매장의 영업이익이 1년에 1억 원씩 증가했다는 점이다.


미국 소비자들은 매년 약 15조 8,000억 원에 달하는 가전제품을 반품한다고 한다. 제품에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상품들 가운데 85퍼센트에서는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소비자가 박스를 개봉한 후 단순히 제품의 사용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제품 설명서나, 판매원이 제품을 전달하면서 고객과 나눈 잘못된 의사소통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제품을 반품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명료하지 못한 제품 설명 때문에 연간 13조 5,000억 원에 달하는 비용 손실이 발생한 셈이다. 그런데 사실 이 수치는 겉으로 드러난 손실액만 고려한 수치다.


질 나쁜 의사소통은 인재 채용 시에 내리는 결정에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많은 인사 담당자들은 말을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훌륭한 영업 사원이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객을 유혹하는 데도 뛰어날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진실은 그와 정반대다. 가장 능률적인 영업사원, 즉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판매원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거기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결국 거래를 성사시키는 건 훌륭하고 균형 잡힌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공감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생각과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 사이에 다리를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공감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내 기분이 어땠을까?”


오늘날 인간의 평균적인 주의집중 시간은 약 8초정도 되는데, 이는 금붕어와 비슷한 수준이다. 일터에서조차 하나의 업무에 오래도록 집중하는 능력은 감소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직장인은 약 3분마다 이메일과 전화, 문자 메시지, 소셜 미디어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주의집중 시간을 감소시킨 주범은 아마도 인터넷일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활용해 인터넷을 아무 곳에서나 어느 때나 할 수 있게 되면서 집중력의 감소가 더 빠르게 진행된 것 같다.


2014년 퓨 연구센터에서 수행된 한 연구는,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상에서 자신이 내보인 견해가 인기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그 견해를 공유하길 꺼려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상당히 역설적인 현상이다. 소셜 미디어가 처음 나왔을 당시만 해도 이 기술이 더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광장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처럼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 넘치는 대화의 가능성이 차단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쓰는 기간 동안, 나는 수첩에다가 (이 얼마나 구식인가!) 매일같이 나누는 대화의 횟수를 기록해 보았다. 이 작업에 착수하기 전만 해도 나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는 대화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눈 대화 횟수를 주의 깊게 기록해 보니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대화하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대화를 전혀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내가 대화 횟수를 높게 추측한 건, 사람들과 온종일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실제로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말에 끼어듭니다. 이런 습관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상대가 말을 할 때 지루해하곤 합니다. 이런 태도를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질 나쁜 대화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곤 한다. 처음 만난 날 어색해서 참기 힘들었다면 상대가 너무 말재주가 없었기 때문이고, 저녁 밥상에서 대판 싸웠다면 상대가 멍청한 무뢰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대화에 꽤 능숙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아마도 자기 자신의 대화 기술에도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대화 능력이 평균은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 또한 엄청난 실수를 몇 차례 겪고 난 뒤에야 대화와 관련해 도움을 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관계 맺는 것을 꺼려한다고 해보자.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에 너무 집중하느라 시간 낼 틈이 없었어.’ ‘동료들이 일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되지.’ 생각은 그렇게 합리화를 하고 있지만, 사실 당신은 옆자리 동료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취하는 거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패턴 리서치 센터의 경영자이자 의사소통 전문가인 팻 와그너는 이런 정당화를 ‘고결한 결점’이라고 부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설명하라” 이것은 내가 저널리스트 생활을 하면서 배운 가장 값진 교훈 중 하나이다. 게스트가 자리에 않으면 나는 이렇게 말해준다. “제가 짧은 인트로를 읽은 뒤 당신을 소개할 겁니다. 대화에 할당된 시간은 약 12분 정도이고, 순식간에 지나갈 테니, 되도록이면 간단명료하게 답변해주세요. 제가 당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가락을 올리는 건, 세그먼트를 끝낼 시간이라는 뜻이니, 하시던 말을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몇 안 되는 이 문장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에 떠는 게스트를,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채 차분히 대화에 임하는 게스트로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나는 이 전략이 스튜디오 밖에서조차 더 나은 대화를 위한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최근 직장에서 한 직원을 징계해야 했을 때, 나는 즉시 미팅의 목적부터 말해주었다. “제가 당신을 부른 건 공식적으로 질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해고되는 일은 없겠지만, 문제가 좀 심각해요. 일단 당신이 저와 회사에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말하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목적은 당신이 성공하도록 돕는 거예요. 당신의 발전을 방해하는 문제들을 인식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지요.”


아들을 꾸짖을 때도 나는 장황한 서론을 늘어놓거나, “엄마가 아침에 뭘 하라고 했지?”처럼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쓰레기 내다버리라고 한 거 또 잊어버렸지? 학교 가기 전에 내다버려라.”


공감은 연민과 매우 다르다. 연민은 “나는 당신을 동정합니다”라고 말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공감은 “나는 당신과 아픔을 같이합니다”라고 말하는 능력이다. 연민은 상대방으로부터 분리돼 있기 때문에 자칫 ‘유감’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감은 상대와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이끌고, 우리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돕는다.


배려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려는 태도가 바로 배려다. 하지만 그러한 의지와 태도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어야 한다. 주변을 보면 자신의 만족이나 명성을 위해 배려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한 배려는 궁극적으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른사람을 이해하려는 의지, 배려, 말로하기엔 참 쉽지만. 삶에서 녹여내어 살아가기엔 정말 어려운 것이 배려이다.

배려하는 척하며 사는 사람. 나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