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번째책] 책먹는법 김이경

책먹는법-김이경

오문오답

1)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 독서모임을 20년정도 진행해오면서, 책읽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잘못된 독서법들을 개선해주고자, 문학읽기의 필요와 이유를 강조한다.

2)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 나는 문학을 읽지 않는다.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고 어렵지 않게 문맥을 이해할 수 있는 류의 책을 즐겨보는 편이다.

  • 저자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문학을 읽어야 하며, 문학을 읽는 위해 문장을 음미하고 섬세하게 언어를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문학이 주는 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3)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는 부모들에게 충고하는 부분.

4) 어떤 점을 배웠는가?

  • 자신의 생각에 갖히지 않고 책을 대하는 저자의 수용성과 열린사고가 대단하다.

  •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축적되는 만큼 자기 고집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독서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고집에 빠지는 상황을 가장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5) 저자에게 한가지 꼭 묻고싶은게 있다면?

  • 20년이라는 시간동안 독서를 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독서했던 시간들이 후회되거나, 독서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로 인해 힘들었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책속의 한구절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을 돕느라 아홉 살 때부터 일을 하셨습니다. 학교에 갈 여유가 있었을 리 없지요. 그 대신 눈이 아리게 종일 일하고 밤에 야학에 가서 읽기와 쓰기, 산수와 노래를 배웠는데 어찌나 재미있고 좋은지 피곤한 줄도 몰랐다네요. 어느 날 갑자기 야학에 대못을 친 “일본 놈들” 때문에 배움은 한순간에 끝나고 말았지만, 어머니는 평생 배움을 동경하고 지식에 대한 경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여 제가 아는 누구보다 빨리 잘 배우는 순발력과 이해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늘 당신이 무식해서 행여 당신보다 많이 배운 자식들을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하셨습니다.


책을 읽고 쓰고 만들며 누구보다 책과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지만 저는 종종 책을 의심합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책 읽기를 권하고 이렇게 독서법에 관한 책까지 쓴 이유는 자신의 무지와 부족을 아는 데 책만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내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당연시하는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내가 누리는 안락에 감사하고 내가 겪는 아픔을 고집하지 않게 하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 원망 없이 받아들이게 하지요.


독서를 즐거운 취미로 삼으려면 책을 고를 때부터 어깨에서 힘을 뺄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해야 한다니까 하는 일이 재미있기는 힘든 법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읽으라고 하든 말든, 남이야 우습게 보든 말든, 일단은 내 마음이 가는 책을 자신 있게 선택해서 읽는 게 중요합니다.


글을 읽고 존경했던 필자가 실제로는 교만하고 무례해서 실망하기도 하고, 까다로운 독자에게 시달리다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문서를 쓰고 읽는 필자와 독자 들이 타인의 사소한 잘못에도 비분강개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왜 보통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이 사람에 대해 더 까칠하고 무례한지, 도대체 책을 왜 읽는지 회의가 들었지요.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부족한 지식과 모자란 경험을 채우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요량이 있기에 책을 읽고 배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버릇처럼 책을 읽습니다. 근사한 제목에 끌려서 읽기도 하고 남들이 읽는다니까 읽기도 하고 심심풀이로 읽기도 합니다. 저처럼 독서가 일이 되어 의무감으로 읽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다 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런저런 지식과 정보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사이, 정작 내 인생에서 풀어야 할 문제는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생각도 못하고 온갖 정보들에 취해 마치 모든 걸 아는 듯이 착각하기 십상이지요.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한 채 섣부른 지식으로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모욕하는 경우야말로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 할 수 있지요.


책을 읽는 방법이야 사람에 따라 책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지만 제가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안에 질문이 있을 때 읽으라는 겁니다. 책이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삶이 던지는 질문에 집중하는 독서를 하라는 것이지요.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정신의학자 빅토르 E. 프랑클은 “산다는 것은 바로 질문을 받는 것”이고 “삶에 책임지고 답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물음을 새기는 독서는 스스로를 성찰하게 합니다. 왜 이 책을 읽는가? 이 책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이 문장에 밑줄을 긋는가? 이 문장이 네 인생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문장을 받아들인 너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질문을 할수록 문장의 무게가 커지고 생각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며 무엇을 바라고 무엇이 부족한지 숙고하게 됩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괴롭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는 게 마음 편할 리 없지요. 하지만 조금 괴롭고 힘들어도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나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꼭 해야 하는 과제이니까요.


제 경험상 오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자인 내가 가진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필자에 대해, 주제에 대해, 때로는 출판 매체에 대해 독자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 이미 어떤 식의 언어나 결론을 전제하고 있을 때 독서는 오염됩니다. 독자가 자신이 기대한 언어나 문장을 발견하기를 원할 때 문장은 그 기대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독서란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만남이며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지요. 업무상 만나는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진실성을 강조하며 실적은 그 결과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최고의 세일즈맨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돈보다 사람에 집중했더니 돈은 따라오더라고 하지 않던가요. 책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읽는 순간에 집중하고 즐기면서 한 권씩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서가 재미있어지고 배움이 쌓입니다. 그런데 1년에 100, 200권 목표를 세워 놓으면 만나는 과정보다 만났다는 결과에 초점을 두고, 읽었다는 사실로 자랑을 삼기 쉽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지요. 정말 중요한 건 독서 목록을 늘리는 것보다 시야를 넓히는 것이고 마음의 크기를 늘리는 것인데 말이지요.


심심풀이 삼아서 재미로 읽는 거라면 대충 읽어도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깨우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읽을 때는 정독을 해야 합니다. 즉 독서의 사회적 책임을 생각할 때 정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쓴 사람의 피땀 어린 공력, 만든 사람의 수고로움, 그걸 읽고 살아갈 내 삶의 소중함 그리고 내가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세상을 생각하면 정성껏 정밀히 읽는 게 당연하지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독서법도 바로 이 ‘정성껏 정밀히’ 읽는 법에 관한 것입니다. 글자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는 꼼꼼함은 그 출발이라 할 수 있지요.


독서 모임의 핵심은 ‘듣는’ 겁니다. 독서 모임에서는 내가 읽은 느낌을 이야기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읽은 느낌을 들어야 합니다. 저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하는 놀라운 독후감만이 아니라 어떻게 저런 식으로 읽을 수 있지 싶은 황당한 소감마저 들어야 하지요. 함께 읽는다는 건 그 무수한 독법을 경험하는 것이며 모든 다름에 내 귀를 열어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럿이 함께 읽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경험과 지식에 기초한 가치관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확신을 가지며, 전혀 다른 신념이나 다른 가치관을 만나면 불편하고 불안한 나머지 ‘틀렸다’고 여깁니다.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니까요.


카프카는 책은 주먹질이요 도끼라고 선언합니다. 심지어 같은 편지글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라고까지 했지요.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서용좌 옮김, 솔출판사, 2004).


책을 읽는 것은 이런 배움의 일부이며, 자신의 무지를 일깨워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각, 다른 지식, 다른 믿음이 불러일으키는 의심과 두려움을 ‘틀렸다’고 치부하거나 눈을 감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똑바로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더 큰 세계 안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이지요.


함께 읽기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독서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눈으로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책은 열심히 읽는 사람이 옆에서 얘기하는 다른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검증되고 정리된 말이기에 존중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은 대단찮은 이야기로 여겨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그러나 책이란 사람을 읽는 것이고 사람은 살아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독서 모임을 할 때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인문학 강좌가 유행이지만 정작 인문학 책은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강의를 들으면 두 시간 만에 알 수 있는 걸 책을 읽으면 20일이 걸려도 알 듯 모를 듯 하니 당연히 강좌를 택하는 것이지요. 보통 이런 대중 강의는 짧은 시간에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서 청중의 수준이나 분위기에 맞춰 전달하므로, 독서보다 시간과 수고를 덜 들이고도 새로운 지식을 얻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강좌가 끝나고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어서 이해를 못 한다는 자괴감은 적고 뭔가를 알았다는 뿌듯함은 크지요. 그러나 강의는 “배우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방법입니다.


강의를 듣든 책을 읽든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선 똑같습니다. 하지만 강의가 독서만 못한 것은 강의로는 지식은 얻을 수 있어도 생각하는 방법은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의든 독서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더디고 힘든 독서를 택하는 까닭은 배움이란 과정을 배우는 것이고 앎이란 몸으로 익혀 아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만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앎은 머리로 외운 지식이 아니라 몸에 새긴 기억입니다. 어떤 일을 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에 따라 작용을 합니다. 이때 일이 더 수고로우면 수고로울수록 그만큼 더 크게 작용하고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지지요. 마찬가지로 낯설고 어려운 책을 읽느라고 안 쓰던 뇌를 쓰고 당혹과 좌절을 맛보고 나면, 책 내용은 잊어도 그 몸과 마음의 작용은 남아 나를 이룹니다. 즉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이대로의 내가 최선이고 최고라서 바뀔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면 몰라도, 좀 더 나은 나, 달라진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내 몸과 마음을 고단하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쉬운 배움, 편안한 깨달음은 없으니까요.


새로운 분야나 새로운 작가를 접할 때마다 이런 어려움을 느낍니다. 책을 펼쳐 처음 얼마 동안은 집중을 못 한 채 그만 읽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지요. 글쓴이의 문체가 복잡하고 까다롭거나 번역이 신통치 않을수록 유혹은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어지간한 책은 무조건 70쪽까지 읽자고 나름의 규칙을 정해 두었습니다. 경험상 그쯤 읽어야 적응이 되기에 정한 규칙인데, 아마 유연하고 명민한 사람이라면 그보다 조금만 읽어도 되겠지요.


음식을 편식하면 영양의 불균형이 생기듯이 독서도 편중되면 생각이 치우쳐 편견과 왜곡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유럽의 지성을 위협했던 종교재판이나 정통 해석과 조금만 달라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인 조선 시대 주자학처럼, 하나의 책 하나의 독해만 신봉하는 것은 종종 피바람을 부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진리고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는 일원론이 타자를 부인하고 공격하는 흉기가 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소설만 읽고 어떤 사람은 논픽션만 봅니다. 남녀 차이도 있어서 대개 여성들은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고 남성들은 경제경영서를 읽는 식인데,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타고나기도 다르게 태어났는데 읽는 것도 다르니 세상을 보는 눈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갈수록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보는 시선,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책이 이해를 돕기보다 오히려 몰이해를 부추기는 셈이지요.


불편함에 불쾌함까지 감수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모름을 확인했듯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여러 분야의 낯선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솔직히 많은 책을 읽고 힘들여 공부했는데도 계속 모른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면 맥이 빠집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를 뿐이고 진리를 알 수 없다면 왜 그토록 힘들게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할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나 생각을 바꿔서, 계속 공부를 하는데도 아직 모르는 세상이 있고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나는 일인가요? 하나의 진리를 믿고 싶다면 많은 책을 두루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믿는 진리로 남을 설득하면 그만이고 설득되지 않는 사람과는 벽을 쌓으면 그뿐이지요. 그러나 설득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의 완강한 몰이해를 낳은 원인이 궁금하다면, 괴롭더라도 그와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기 위해 그의 말을 듣고 그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낯선 책, 읽기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은 그 시작이라 할 수 있지요.


야트막한 동네 뒷산만 오르던 사람이 지리산 종주에 나서면 몸의 한계를 만납니다. 삭신이 쑤시고 발톱은 빠질 것 같고 숨은 턱에 차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정상에 올랐을 때 만나는 진경, 그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 이상의 감동입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과 번민과 몰이해와 수고를 감내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아, 이런 세상이 있구나! 벅찬 기쁨이 찾아옵니다. 물론 때로는 기쁨이 아니라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고작 이런 것을 알려고 그 고생을 했던가! 그러나 어느 경우든 안 쓰던 뇌와 감정의 근육이 새롭게 깨어나면서 얻는 희열은 남습니다.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은, 어렵다고 여겼던 앎을 얻는 기쁨만이 아니라 내 안의 세포를 깨워 한계를 넓히는 드문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르는 세상, 내가 모르고 외면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해서도 반드시 어려운 책을 읽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연필을 들고 책을 읽습니다. 책 여백에 각각의 단락에서 얘기한 것이 무엇인지 적습니다. 내용 파악이 잘 안 되거나 독서에 집중이 안 될 때면 더욱 열심히 적습니다. 혹시 핵심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니요! 중요한 문장이나 감동적인 문장을 보면 절로 밑줄을 긋게 되지만, 문맥을 이해하는 데는 밑줄 긋기만으론 부족합니다. 밑줄 긋기는 글쓴이의 문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인 데 비해 핵심어를 적는 것은 글쓴이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옮기는 것이므로 밑줄 긋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고전의 창조적 재해석이니 뭐니 하지만 실제로 창조적 독해를 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오랜 시간 텍스트를 들여다보며 의심하고 해체하고 자료를 섭렵하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자연히 독서법도 달라집니다. 몸을 흔들며 소리 내어 읽기보다는 가만히 묵독하게 됩니다. 어지간한 멀티플레이어가 아니고서는 계속 큰 소리로 읽으면서 심오한 생각을 하기는 힘드니까요. 그래서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묵독을 금기시하기도 했답니다. 혼자 소리 없이 읽으면서 『성서』에 대한 공인된 독법을 부인하고 자기만의 해석을 할까 봐 막은 것이지요.


부모님이 책을 사 주며 읽으라고 한 적은 없어도, 저를 포함한 다섯 형제가 모두 책을 좋아하고 서너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된 데는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법이랄까 역할이 있었습니다. 신문을 이용한 밥상머리 토론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형편이 쪼들릴 때에도 우리 집은 조간, 석간에 어린이 신문까지 대여섯 가지 신문을 구독했고 그날의 뉴스는 으레 밥상의 토론 주제가 되었지요. 엄밀히 말하면 토론이라기보다 주로 아버지의 시사 비평을 듣는 식이었지요. 하지만 언로가 꽉 막힌 일방통행은 아니어서 때론 손위 형제들이 반론을 하거나 자기 생각을 얘기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신문을 읽고 대화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비판적 독해와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독서를 권하고 싶다면 독서 교육을 시키는 대신 직접 책을 읽으십시오. 아버지, 어머니가 하루에 30분이라도 책을 읽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괜한 돈 들여 독서논술 학원에 보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아이들은 집안 어른들이 책과 신문을 읽고 세상사를 논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이란 저런 존재구나 하고 배웁니다. 부모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 하면 설령 아이가 책을 읽는 사람이 된다 해도 부모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흔히들 권위란 독재적인 것이라 여겨 없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권위를 배우고, 그 권위에 맞서 스스로를 주장하기 위해 일하고 공부하며, 그렇게 새로운 지식과 경험으로 권위를 넘어 성장합니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은 기존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 가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독서만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에도 도움이 됩니다.


요즘 아이들은 자연을 책으로 배웁니다. 하지만 책 속의 자연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지 못합니다. 정말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고 싶다면, 도서관만 다니지 말고 산으로 들로 골목길로 데리고 다니며 세상 만물을 읽게 해 주세요. 발이 뜨거운 어릴 적엔 발로 세상을 읽고, 가슴이 뜨거운 젊은 날엔 가슴으로 사람을 읽고, 머리로 기운이 오르는 중년 이후엔 머리로 책을 읽는 것이 생애 리듬에 따른 공부법이니, 순리에 맞게 배우고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수십 권씩 되는 전집으로 책장을 빽빽이 채우는 일은 부디 참아 주세요! 아이에게 독서 교육을 시킨다며 책을 그득하게 쌓아두는 건 아이 입장에선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열 권, 스무 권씩 되는 전집은 더욱 그렇지요.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책 한 권을 오래 깊이 생각하며 읽는 집중력이 떨어지기 쉬운 데다, 책의 수준이나 만듦새에서도 들쑥날쑥 제각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독서란 그저 책에 적힌 글자나 정보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질문하면서 스스로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대로 한 인간의 삶을 이루는 내밀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강요에 의해 의무적으로 한다면 이미 독서의 쓸모나 재미는 다 사라져 버릴 것이니, 그런 독서를 누가 즐겁게 하겠으며 그런 독서를 해서 뭐하겠습니까?


문학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력, 세계를 다르게 보는 눈,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힘을 키워 줍니다. 그리고 그 힘은 문학이 사람을 읽는 눈을 길러 주는 데에서 나옵니다. 나를 읽고 너를 읽고 우리와 그들의 세상을 읽으면서, 각자의 삶과 그 삶들이 한데 어울려 만드는 이 세상을 더 깊고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문학은 내부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던 어느 날,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적힌 짧은 시 한 편에 아득해지는 것이지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시구에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마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 왜 이렇게 기를 쓰고 있을까, 잊고 있던 질문을 떠올리면서 말이지요. 시가 아니라면 무엇이 이토록 짧은 순간에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문학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른 존재가 실은 나와 똑같이 사랑하고 고통 받고 살고 죽는 존재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다른 존재, 다른 세계에 공감하면서, 내 안에 빛과 어둠이 있듯이 타자의 내부에도 빛과 어둠이 있으며, 내가 겹겹의 존재이듯이 타자 또한 한마디로 요약될 수 없는 겹겹의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문학이 가진 이 공감의 상상력이야말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나 작품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은 결국 다른 작가와 작품을 배제하는 말이고, 내가 알고 좋아하는 것이 최고라는 독선의 표현이니까요.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해도 카프카나 보르헤스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니, 각자에겐 저마다의 경이로운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여러 작품을 섭렵하며 각각의 독특함을 최대한 즐기면 좋겠습니다.


문학 독서에서는 다양함만큼 섬세함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므로 언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문체, 묘사, 비유, 상징 등 낱낱의 표현과 서술 방식에 마음을 쓰면서 세심하게 읽는 거지요. 많은 독자들이 문학을 읽을 때 작품의 주제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골몰해 언어와 문장 스타일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이 주는 감동의 상당 부분은 작가의 심오한 사상이 아니라 이를 전달하는 언어에서 나옵니다. 언어적 표현이 미숙하다면 아무리 심오한 사상도 독자를 사로잡지 못하지요. 따라서 문학을 읽을 때는 무엇보다 언어에 민감해야 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비슷한 주제나 상황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으니 그것을 헤아리며 읽어야지요.


문학은 사람을 보여 주는 가장 큰 창窓이니 거기 비추인 사람들을 읽기 바랍니다. 문학을 읽는 것은 사람을 읽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이나 역사, 심리학도 다 사람을 이야기하지만 문학은 사람의 행동과 심리를 판단하기보다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기에, 열 길 우물 속보다 깜깜한 한 길 사람 속을 상상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책을 읽는 이유는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문학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 특히 나를 아는 데에 가장 좋은 자료입니다.


독서가 훈장도 자랑거리도 아니란 데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네 하면 많은 사람들이 존경 어린 눈길을 보내며, 그 눈길을 받으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책만 읽었을 뿐인데도 우쭐해합니다. 이런 으쓱한 기분이 좋아서 독서를 하는 이들도 꽤 많은데, 하지만 여기엔 대가가 따릅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책은 책이니 머지않아 사람들은 배신감을 토로하며 따집니다. 아니, 그런 책을 읽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 결국 문제는 삶입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잖아요. 원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해설서가 아니라 원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집중해서 읽는 것은 내 식대로 이해하기 위한 토대이며, 내 식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내 삶을 살기 위한 출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머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읽은 느낌으로 무슨 뜻이라고 단정하거나 유명인의 해석에 기대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모든 지력을 총동원해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