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번째책]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김하나

당신과나의아이디어-김하나

오문오답

1)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 창의적인 아이디어란 천재성을 지닌 개인의 능력에서 비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기본기에 충실했을 때,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 생긴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2)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 IT 분야에 종사하는 개발자로서 최근 관련분야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했었다. 차량에 연료를 넣지도 않고, 차가 나가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는 꼴이다.

3)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 초반부는 내용이 눈에 잘 들어왔으나, 중반부를 지나고부터는 연관성 없는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여 나열하다보니,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4) 어떤 점을 배웠는가?

  • 기본기에 충실하자. 탑을 안전하고 높게 쌓으려면 기본이 되는 하부가 넓고 튼실해야한다.

5) 저자에게 한가지 꼭 묻고싶은게 있다면?

  • 저자가 경험했던 아이디어의 실제 사례를 책에 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저자의 이야기를 넣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책속의 한구절

창의성의 신화는 은연중에 창의적 작업이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대단한 일이라는 느낌을 주지요. 아이디어와 영감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선택된 누군가가 거기 사로잡혀 신탁처럼 그걸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는 신화요. 어쩌면 창의성의 신화가 우리 대부분을 창의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어떤 분야에 있어서 창의적인 성과를 내려면 일단 어떤 식으로든 성실하고 진지하게 기본을 배워야 해요. 그래야 그걸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하려는 말은, 당신은 창의성을 발휘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는 거예요. 창의성은 감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의성은 태도의 문제예요.


우리가 ‘어른스럽게’ 천재 신화를 바라본다면 그들의 광기나 고통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 그들이 이룩해놓은 것에 경외감을 갖고 순수한 집중력과 진지함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대중은 천재 신화를 낭만적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진지함과 성실함보다는 광기와 기벽을 흉내내려 들기도 하지요.


우리가 천재의 삶에서 배워야 할 점은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사과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자기 일의 기본을 성실하게 배워온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이제 창의성의 자세도 훌륭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창의성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소수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에요. 말했죠? 창의성은 하나의 태도라고요.


누구나 창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밖에서 대단한 영감이나 자극을 받더라도 그건 일종의 촉매일 뿐이에요. 그 영감을 접한 내 안에서 무언가가 ‘스파크’를 일으켰기 때문에 전구가 켜지는 겁니다. 그러니 내 안에 전류를 일으킬 무언가가 들어 있지 않으면 어떤 영감이나 자극도 전구에 불을 켤 수 없어요


사람들 속에는 씨앗이 유영하듯 떠돌고 있어요. 생생히 기억이 나는 씨앗도 있고 내 안에 들어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씨앗도 있어요. 그런 말이 있죠.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우리의 거대한 무의식 공간 안에도 온갖 씨앗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씨앗들이 어떤 자극으로 인해 부딪치거나 서로 교류를 일으키면 아이디어의 싹을 틔워낼 수도 있지요.


반짝임을 발견하면 할수록 우리 안의 씨앗들은 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땅으로 치면 비옥해지는 거지요.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서로 부딪치고 섞이며, 싹트고 자라날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모두의 경험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여행을 가고, 다른 책을 읽지요. 각자의 삶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반짝임을 발견하고, 그걸 따라가면 자신만의 창의성의 세계로 어느새 들어서 있게 될 거예요. 물론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은 손에 쥘 수 있는 벽돌 같은 단어, 아이디어입니다.


다만 아주 사소한 차이, ‘이게 좀 더 낫다’고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죠.


일상생활에서의 무수한 감각을 구분하기보단 그저 느끼며 살면 되겠지만, 그것을 ‘감각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수많은 감각이 창의성의 씨앗이 되어 들어옵니다. 그리고 어떤 감각을 자아내거나 연출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모두 아이디어로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우린 사람이 아닌 신념을 기억하라 배웠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으므로. 사람은 잡힐 수 있고, 살해될 수 있고, 잊혀질 수 있다. 하지만 400년이 흐른 뒤에도, 신념은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 We are told to remember the idea, not the man, because a man can fail. He can be caught, he can be killed and forgotten, but 400 years later, an idea can still change the world.


인류라는 벌레가 사는 관념의 숲을 여행하다보면 정말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아이디어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숫자나 문자, 돈, 결혼, 장례, 집 같은 것들은 아주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결코 처음부터 있었던 것들은 아니에요. 누군가가 시도하고, 아이디어를 더하고 더해 정교해지고,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 교류할 때 전해지기도 하며, 오랜 세월 울창하게 자란 거대한 아이디어 나무들이지요.


모든 것이 아이디어란 말은, 지금은 절대 진리이고 결코 변치 않을 법칙 같은 것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바뀔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술가의 일화는 천재, 광기, 벼락같은 영감, 기적 등의 화려한 단어로 점철되는데, 이것은 창의성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옵니다. 수없이 많은 가능성의 갈래 사이에서 갈등하고, 실험하고, 선택해야 하는 예술가의 분투와 집중, 끈기, 성실성 등은 저 화려한 단어들 뒤로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예술가의 선택이 쌓여서 태어난 것이지요.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예술가의 모든 선택은 아이디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면 좀 낫지”라는 말 생각나세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릴 때 쏟아넣은 것은 수천, 수만 가지의 아이디어예요. 그건 아주 다양한 층위에 걸쳐 있고,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세포와 세포가 결합해서 유기체를 이루는 것과도 같지요.


예술작품에 스민 ‘아이디어’들을 발견하는 건 일견 예술에 대한 얕은 접근법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도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습니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라도 말이에요. 누군가의 이러저러한 새로운 시도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사람에게로 ‘씨앗’이 되어 옮겨가지요.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는 이런 말을 했어요. “비평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예술은 벙어리인 것이다”라고요.


‘도대체 이런 작품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고 경외감을 갖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그 작품들도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예술가가 어떤 솜씨로 어떻게 새로운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예술가가 내리는 일련의 선택 과정을 아이디어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것이 다른 아이디어로 대체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더 이상 절대 변할 수 없는 완결된 실체로 자리하기보다는 예술가의 가장 원대하고 또 가장 디테일한 아이디어의 연속된 결과물로 여겨지게 될 거예요.


불가사의한 과정을 거쳐 일단 시가 태어나면, 우리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콜트레인이 색소폰으로 열어젖힌 재즈의 크기만큼, 당신이 감탄하며 음미하는 깊이만큼, 당신의 아이디어는 더 늘어나는 거예요. 그 아이디어를 설명할 필요는 없지요. 우린 그냥 느끼는 만큼 얻는 거예요.


그녀 사람들마다 취미와 취향이 모두 다르니 우리 각자가 얻게 되는 아이디어는 다 다를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에 스며 있는 태도는 모두 같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그건 다름이 아니라······. 그녀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노리는 연주자처럼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떼었다. 그녀 ‘이러면 좀 낫지’라고요


예술이란 작게든 크게든 벽을 넘어가는 속성을 지녔지요. 아무런 벽도 넘어가지 않는 예술은 그저 진부하기만 할 겁니다. 그래서 좋은 예술은 언제나 신선하지요. 벽은 끝없이 자란답니다. 깜짝 놀랄 만큼, 끊임없이 자라나고 단단해집니다. 당연하기도 해요. 그런 벽이나 틀이 없다면 우리는 무언가의 체계를 세울 수도, 뭔가를 평가하거나 배울 수도 없을 테니까요. 벽은 인식의 출발점이지요. 이 벽을 기준으로 이쪽은 A라고 하고, 저쪽은 A가 아니라고 정해두는 거예요. 많은 것이 그 벽으로부터 출발하고 많은 성과가 그 벽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벽은 단단하고 익숙한 안정감을 주지요.


사람들은 스포츠를 ‘더 높이, 더 빨리, 더 힘차게’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훈련하는 것만이 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더 높이, 더 빨리, 더 힘차게’에 도달하기 위한 ‘더 나은’ 길이 있을 수도 있지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열심히’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 내 앞을 가로막은 벽이 정말로 단단한 벽인지, 아니면 내가 밀어 넘어뜨리거나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인지를 실험해보는 것 말예요.


이젠 거꾸로 뛰는 게 바르게 뛰는 것이고, 웅크려 출발하는 게 바르게 출발하는 것이며, 뒤집어 턴하는 게 바르게 턴하는 게 됐죠. 나 결국은 바르다는 게 영원히 바른 건 아니라는 거군요. 지금은 모두들 거꾸로 뛰니 그게 바른 방식이 된 거고. 그녀 그거예요! ‘바르다’는 건 효율적인 방법일 수도 있지만, 고정관념일 수도 있는 거예요.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하는 것처럼요. 오른손잡이가 더 많다뿐이지 그게 ‘바를’ 건 또 뭐랍니까.